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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in生] 종횡무진 '가상인간'… 나만 불편한가

최근 금융감독원은 소비자경보를 신속하게 제작, 전달하기 위해 AI아나운서를 도입했다. (출처:금융감독원)
최근 금융감독원은 소비자경보를 신속하게 제작, 전달하기 위해 AI아나운서를 도입했다. (출처:금융감독원)
[디지털데일리 신제인 기자]
아나운서 지망생 A씨(25)는 최근 들어 시름이 깊다.

“기존의 프로 아나운서들을 학습한 완벽한 AI 아나운서가 나오고 있는데, 회사가 본인을 뽑아야 하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요?”

얼마 전 면접에서 면접관으로부터 이같은 질문을 받았다.

예상질문과 답변을 미리 준비해간 덕에 상황은 무난히 넘겼지만, “막상 질문을 받으니 왠지 울적했다”는 소회를 밝혔다.

A씨는 이어 “내가 가상인간보다 나은 이유를 설명하면서도 솔직히 불안한 건 어쩔 수 없다”고 전했다.

질문에 대한 모범답안은 사실 간단하다. ‘인간미’를 드러내는 것이다. 약간의 부족함은 인정하지만, ‘그로 인해 비로소 더 완벽할 수 있다’와 같은 클리셰를 이용하면, 적어도 감점은 받지 않는 무난한 답안을 만들 수 있다.

생각해보면, 빈틈과 불완전함을 지능적으로 이용하는 수법(?)은 비단 요즘 들어 나온 이야기는 아니다.

언제부턴가 기업들이 바라는 인재상이 막강한 힘과 카리스마를 지닌 과거의 리더형에서 수평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소통할 줄 아는 현대사회의 리더형으로 변화함에 따라, 인간미는 꽤 중요한 덕목이 된 지 오래다.

다만 같은 인간끼리 인간미를 겨루는 것과 ‘완벽한 비인간’에 견주어 인간미, 즉 부족함을 역으로 자랑하는 것은 느낌이 사뭇 다르다. 더군다나, 그동안의 문명을 일궈온 인간 중심적인 시각으로는 인간보다 ‘잘난’ 대상이 있다는 사실부터 유쾌할 리가 없다.

◆인간 vs 가상인간…’밥그릇 싸움’ 현실로

'여리지'가 국내 관광지를 소개하고 있다. (출처: 한국관광공사)
'여리지'가 국내 관광지를 소개하고 있다. (출처: 한국관광공사)
얼마전 까지만 해도 인간의 일자리를 빼앗는 건 자동화 공장의 로봇이 전부였다. 기술의 발전에 따라 가상인간이 점차 정교화되더니, 이들이 인간의 일자리를 빼앗을 수 있다는 우려는 곧 현실이 됐다. 실제로 이제는 굵직한 자리에서 인간을 대신하는 가상인간이 늘어나는 추세다.

지난 7월, 앞서 손흥민, 엑소 등 유명 스타들이 맡아왔던 한국관광공사 명예 홍보대사에는 가상인간 ‘여리지’가 발탁됐다. 이전 모델들과 달리 우리나라의 위상을 세계에 알린 공적은 없지만, 누구에게나 호감을 줄 수 있는 예쁜 외모가 특히 눈에 띄었다.

이처럼 방송·광고 업계에는 ‘불쾌한 골짜기’를 극복한 매력적인 외형으로 종횡무진 활약하는 가상인간이 이미 적지 않다.

무신사 전속모델 ‘무아인’, 국내 유명 모델 에이전시 ‘에스팀’ 소속 패션모델 ‘류이드(RyuID)’, 롯데홈쇼핑의 쇼호스트 ‘루시’ 등이 대표적인 예다.

또 버추얼 인플루언서로 이름을 알린 ‘로지’와 ‘한유아’는 최근 TV광고 출연은 물론, 음반까지 내며 ‘만능 엔터테이너’의 반열에 들어섰다.

이들이 선호되는 이유 중 하나로는 ‘적은 노동력으로 마음껏 조종할 수 있다’는 점이 꼽힌다. 원하는 모습은 무엇이든지 구현해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실수와 번뇌에 시달리는 인간과 달리 사건사고 및 논란의 여지가 아예 없다. 소속 연예인 또는 전속모델의 사고 수습에 많은 품을 들이는 기획사나 광고주 입장에서는 반가운 소식이다.

◆영원히 늙지 않는 가상인간, ’외모 강박’ 부추기나

비현실적인 외모를 자랑하는 '로지(왼쪽)'와 '한유아(오른쪽)'. 각각 22세, 21세로 설정됐다. (출처: 인스타그램 @rozy.gram @_hanyua)
비현실적인 외모를 자랑하는 '로지(왼쪽)'와 '한유아(오른쪽)'. 각각 22세, 21세로 설정됐다. (출처: 인스타그램 @rozy.gram @_hanyua)
이외에도 가상인간은 인간과 달리 365일 언제나 완벽하고 아름다운 외모를 유지할 수 있다. 연예인들의 비활동기와 활동기 간 차이를 두고 ‘입금 전과 후’의 모습이라고 놀리던 일종의 굴욕도 가상인간에겐 해당하지 않는 셈이다.

이는 곧 외모가 큰 경쟁력으로 작용하는 방송∙연예계에서 가상인간이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언제까지나 방송∙연예계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닐 수 있다. 고객을 직접적으로 응대하는 ‘호텔리어’나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켜야 하는 ‘강사’와 같이 호감형의 외모가 큰 강점으로 작용할 수 있는 직업군에서도 화면 속 가상인간이 우리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을지 모른다.

이와 관련해 외신도 우려를 표했다.

CNN은 지난달 31일, 한국의 가상인간 열풍을 주목하며 “‘세계 성형 1번지’로 종종 불리는 한국에서 가상 인플루언서들은 안 그래도 비현실적인 외모 기준에 대한 대중의 선망을 더 부추길 수 있다”고 보도했다.

한때 마른 아이돌을 선망하며 음식 섭취를 거부하는 청소년이 늘어났던 것처럼, 미디어에서 비춰지는 모습의 부정적인 영향을 염두하고 이에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해결책을 고민해보면, 결국 원론적인 이야기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앞으로는 그 무엇이 아닌 ‘나 자신’의 매력을 승부수로 삼는 자세가 더욱 필요하다.

인간이 만들어 낸 ‘가상인간’의 기준에 다시 인간을 맞춰야 하는 날은 오지 않길 바란다. 인간 스스로 만들어낸 또 하나의 우상(偶像)에 지배를 받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불행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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