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데일리 고성현 기자] "삼성이 주도해 온 건 공정 기술입니다. 메모리반도체와 관련된 표준은 항상 미국 등 다른 권역의 기업이 선도해왔지만, 이를 빨리 캐치해 선단 공정의 제품을 내놓는 '패스트 팔로워' 전략이 지금의 삼성을 만들었어요. 하지만 비메모리 영역에서는 이러한 전략이 통하지 않고 있고, 메모리에서마저도 기회를 크게 놓쳤습니다. 지금은 다시 한번 삼성의 전략을 바로 세워야만 하는 시기입니다."
올해 초 지펴진 삼성전자 위기론이 현실화되면서 이를 지적하는 메시지가 업계를 막론하고 등장하고 있다. 경기침체로 인한 소비자 IT제품 수요 둔화 현상이 지속되는 가운데, 삼성전자의 실적 기반을 지지하던 반도체 사업이 흔들리고 있어서다. 특히 이번 3분기 실적이 인공지능(AI) 인프라 확대에도 성과를 거두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전영현 반도체사업(DS)부문장이 시장에 사과의 메시지를 내놓는 이례적인 상황까지 연출됐다.
업계에서는 삼성전자의 위기론이 이제 막 시작된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분위기다. 과거에도 삼성의 미래를 우려하는 여러 지적들이 잇따라 나온 바 있지만, 이러한 점이 충분히 개선되지 못하면서 현재의 위기 상황까지 이어졌다는 의미다. 현재까지 나온 문제점조차 하나의 페이지에 담기도 어려울 만큼 늘어났다. 누군가는 고대역폭메모리(HBM) 개발을 멈춘 과거의 판단을 지적하는 한편, 또 다른 누군가는 성과주의·내부 경쟁 중심의 조직문화와 늘어난 주요 인력 이탈이 문제라는 견해도 내놓고 있다.
삼성전자 출신의 한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어느 순간부터 기술 개발보다 사업 성과가 더욱 중요한 분위기가 만연해졌다. 자신의 분야에 열과 성을 다해 기술을 개발하던 엔지니어들은 '이것이 돈이 되겠냐'는 윗선의 말에 계속해서 위축됐고, 현재 잘하고 있는 지점에서 성과를 내야만 인정받는 상황이 됐다"며 "어쩌다 돈이 되지 않던 기술이 돈이 되기 시작하면 어깃장을 놓던 임원이나 타 부서가 그 성과를 가로채는 일도 암암리에 있어왔다"고 회고했다.
그는 "이러한 조직 내 문제는 비단 삼성뿐 아니라 타 반도체 회사에서도 있는 일이지만, 이러한 상황을 바로잡고 사업성과 관계 없이 미래 기술을 개발하는 엔지니어에 힘을 실어주는 경영진이 없었다는 것은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러한 문제점의 원류를 따라가다 보면 결국 반도체 사업에 대한 '컨트롤타워'가 수년 간 부재한 것이 치명적이었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반도체 사업을 지속하기 위한 방향성이 여러 갈래로 혼재되면서 성과를 내지 못했고, 이에 따라 비메모리 영역인 설계와 파운드리, 메모리인 D램과 낸드 모두 약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2017년 국정농단 사태로 해체된 미래전략실의 중요성에만 집중하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미전실 해체가 삼성전자의 동력 약화에 한몫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 이전부터 지속된 방향성 문제가 개선되지 않았다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이와 관련 또 다른 고위 업계 관계자는 "사업에 대한 의사결정을 추진하고 미래전략을 구성하는 미래전략실의 역할도 분명 중요했으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확실한 '퍼스트 무버'로 도약하기 위한 로드맵이었다"면서 "미전실 해체 이후 그러한 방향성이 유야무야되면서 삼성은 비메모리 생태계 구성은 물론, 미국 기업이 주요 소비자로 자리 잡은 현지 메모리 트렌드 팔로잉도 더뎌지게 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만약 미전실이 지금 당장 부활한다손 치더라도 그 미전실을 이끌게 되는 인물은 누가 돼야 하나. 그리고 미전실은 무엇을 목표로 현재 위기를 타파해야 하는가"라며 "반도체 산업을 바라보는 명확한 방향성 제시 없이는 생태계를 직접 꾸려 장기적인 미래를 그리는 '퍼스트 무버'가 아닌, 또다시 나타난 경쟁자를 따라잡기 위한 단기 방편에 그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삼성전자가 현재 놓친 HBM, 파운드리 시장의 원인은 이미 지나간 과거에 발생한 것들이다. 현재 발생한 원인은 다가올 5년, 10년 안에 또 다른 결과로 발현될 것이다. 현재 시장 경쟁자를 추격하기 위한 내부의 노력은 이어져야 하지만, 그것에 매몰되서는 안된다는 것이 이들 견해의 핵심이다.
오롯이 위기만이 부각되는 현 시점에도 긍정적인 요소는 있다. 삼성전자의 재무 체력이 여전히 탄탄한 점, 현재 HBM·GPU 중심의 AI 인프라가 수익성 문제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할 가능성이 있는 점. 지난 5월 부임한 전영현 DS부문장이 열성적으로 내부 문제를 들여다보고 있는 점, 그리고 새로운 인물을 올리고 과거의 인물을 다시 짚을 수 있는 인사 시즌이 다가오는 점도 그 중 하나다.
삼성전자와 같은 거대 테크 기업의 근본은 수익성이 아닌 기술에 있어야 한다. 결국 많은 기술 역량과 이를 토대로 한 기업 간의 파트너십이 곧 상업적인 성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시장의 기대치가 내려가고 위기 요인이 쏠려 있는 지금이 오히려 삼성전자가 쌓아 온 성공의 DNA를 다시 쌓을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변화의 시기가 점점 지나가고 있는 만큼, 이를 놓치지 않고 다시금 저력을 보여주는 삼성전자가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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