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데일리 문대찬기자] 국내 이스포츠 업계 관계자들이 사우디아라비아의 ‘e스포츠 월드컵(EWC)’을 향후 이스포츠 산업 도약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이스포츠 종주국으로서의 주도권을 잃을 수 있다는 우려는 차치하고서라도, 산업 생태계를 확장하고 현지 업체들과 파트너십을 구축하는 등 확실한 실리를 챙겨야 한다는 목소리다.
27일 오후 국회 도서관 소회의실에선 박정하 의원(국민의힘)과 강유정 의원(더불어민주당)이 주최하고 문화체육관광위원회가 후원하는 ‘2024 e스포츠 토크콘서트’가 열렸다. 이스포츠 관련 협회 및 정부 관계자와 게임단 관계자가 자리해 EWC를 톺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EWC는 사우디아라비아가 천문학적인 자본을 쏟아부어 지난 7월부터 두 달간 개최한 대회다. 총상금만 6000만달러(한화 약 840억원)에 달해 업계 이목을 모았다. 게임 지식재산권(IP)이 없는 서드 파티 오거나이저가 대규모 이스포츠 대회를 주최한 건 전례가 없다.
빈 살만 왕세자는 국영기업 새비게임즈를 통해 2030년까지 50조원을 EWC에 투자하겠다고 밝힌 상황이다. 아울러 IOC(올림픽조직위원회)와 맞손을 잡고 내년부터 ‘e스포츠 올림픽’을 개최하기로 했다. 대회는 2년 주기로, 사우디 수도 리야드에선 4년 주기로 열리는 구조다. 석유 위주 산업에서 나아가 이스포츠·게임 산업에서 헤게모니를 가져가겠단 의지가 짙다.
크래프톤 이민호 이스포츠 총괄은 “사우디는 평균 연령이 29세로 굉장히 젊은 나라다. 게임 산업에 상당히 잘 맞는 환경”이라며 “중동 국가들은 석유 산업을 넘어선 인프라와 시스템을 갖추고 싶어한다. 이스포츠 대회 뿐 아니라 거대한 게임 신도시를 만들고 이스포츠 엔터테인먼트 시설을 만들고 있다. EWC는 이러한 국가 전략의 일환”이라고 사우디 행보를 짚었다.
게임단 DRX를 운영하는 사모펀드 ATU 파트너스 박정무 대표는 “단순 중계권료를 벌겠다는 개념보다는 과거 우리나라가 올림픽과 아시안게임 등을 유치했던 것처럼 막대한 비용은 차치하고서라도 여러 부가적인 경제 창출 효과나 이에 따른 인프라 구축을 기대하고 있는 것 같다”며 “전략적이고 정성적으로 이스포츠 투자를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날 자리에서 관계자들은 EWC가 이스포츠 업계에 절호의 기회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스포츠 산업 카테고리가 더욱 다양해지고, 확장될 것이라는 관측이다. 대회 종목을 보유한 IP(지식재산) 홀더들에겐 거대한 마케팅의 장으로 활용될 것이라는 목소리도 있었다.
게임단 광동 프릭스 채정원 대표는 “EWC에 참가해 팀이 좋은 성적을 거두고 상금도 취하면서 운영에 좋은 시그널을 얻었다. 또 숲이라는 스트리밍 플랫폼도 운영하는 입장으로서도 중계권과 관련해 좋은 성과를 거뒀다고 생각한다”며 “단 1회 개최만으로도 업계 움직임을 바꿀 계기가 됐다고 생각한다. 향후 EWC로 인해 게임단 운영 방식이 바뀔 것”이라고 봤다.
이어 “기존에는 국내에서 인기있는 종목 팀 위주로만 게임단을 운영할 운영해야 하는 입장이었는데 글로벌적으로 인기 있는 종목들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고, 관련한 투자자나 스폰서와 손을 잡을 수도 있을 것이다. 향후 게임단 확장의 허브로 활용될 것”이라고 부연했다.
박 대표도 “상금 외에도 게임단을 신규로 창설하는 모티베이션이 될 것이라고 예상한다. 팬덤 효과가 제한되면 투자를 행하기가 쉽지 않은데, EWC가 들어서면서 조금 더 다양하게 팀을 창설하고 육성할 수 있는 생태계 변화가 이뤄질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격투게임 ‘철권’ 프로게이머 배재민 선수는 “비인기 종목 선수들도 큰 상금을 얻을 수 있다보니 마이너 종목 도약의 발판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선수 입장에서 봤을 땐 진지하게 인생을 바꿀 수 있는 기회다. EWC가 계속 지속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하기도 했다.
게임단 운영 외 다각도로 사업을 확장할 기회가 될 것이라는 분석도 나왔다. 젠지e스포츠 이지훈 상무는 “글로벌 산업적으로 현지 회사들과 파트너십을 모색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게임단 입장에선 두 팔 벌려 환영할 일”이라고 평가했다.
관계자들은 이날 사우디발 모래 바람에 정면으로 맞서기 보다, 순풍에 몸을 맡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 이스포츠씬의 강점인 ‘맨파워’를 살려 도약 기회를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총괄은 “EWC를 통해 다양한 생태계 확장을 기대할 수 있었다. 크래프톤은 향후 ‘배틀그라운드’ 주요 연간 대회에 EWC를 포함하려고 한다. 아마 다른 IP 홀더들도 향후 EWC를 연간 주요 계획으로 삼지 않을까 싶다”면서 “종주국이라는 키워드에 매몰되기보다 실리를 찾아야 한다. 우려되는 부분도 있지만 중요한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e스포츠협회 김철학 사무처장은 “1년 주기로 열리는 EWC와 2년 주기로 개최되는 e스포츠 올림픽까지, 사우디아라비아가 10여년간 메가 이스포츠 이벤트를 개최하는 셈이 된다”며 “종주국이라는 이름에만 취해있기 보다는 위기 의식을 갖고 대응해야 한다. 자본으로는 경쟁이 사실상 힘들다. 우리 강점인 맨파워를 어떻게 키울지 고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박 대표는 “이미 사우디가 아젠다를 잡았다. 지금에서 우리가 관련 월드컵 등을 만드는 건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정부 차원에서 나서 e스포츠 올림픽을 유치하는 식으로 이러한 흐름을 이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맨파워를 강조하려면 정부 지원이 있어야 한다. e스포츠를 콘텐츠 분야 모태펀드로 포함하거나 분리해 자금 흐름을 원활하게 해야 한다”고 부연했다.
그는 “다른 국가에서 한국 이스포츠 아카데미 시스템에 대한 니즈가 강하다. 관련해 정부와 협회 차원에서 중동 국가들과의 교류가 필요하다”면서 “사우디의 행보를 잘 이용한다면 국내 이스포츠 산업이 더 커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종주국으로서 이스포츠 산업 주도권을 쥘 기회가 여전히 남아있다는 목소리도 있었다. 채 대표는 “문화 콘텐츠 산업으로 봤을 때 게임과 이스포츠는 여전히 전세계적으로 우리가 주도권을 갖고 스탠다드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민관이 함께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이날 참석한 문체부 관계자는 사우디아라비아와 공조해 산업 교류 장벽을 완화하고 e스포츠 올림픽 등 메가 이벤트 유치에 힘쓰겠다고 밝혔다.
문체부 이영민 게임과장은 “중동에서 이스포츠 분야에 막대한 투자를 지속하면서 이스포츠 종주국으로서 한국의 입지가 흔들리는 것 아니냐라는 우려에 대해 문체부도 많은 고민을 하고 있다”며 “국산 종목들이 많이 배출 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우수한 선수들이 배출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게 정부 역할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사우디와 공조해서 교류 장벽을 낮춰줄 수 있는 외교적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도 노력할 것”이라며 “정부 차원에서도 관련 메가 대회를 유치하는 부분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검토하겠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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