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데일리 한주엽기자] 삼성전자와 삼성직업병가족대책위, 반올림은 16일 오후 법무법인 지평 사무실에서 조정위원회 주재로 2차 조정을 가졌다. 이들은 조정위원장인 김지형 지평 소속 변호사(전 대법관)의 제안에 따라 9일 조정위에 사과와 보상, 재발방지 대책이 포함된 안을 제출했다. 각 측은 이날 공개된 자리에서 제안 내용을 발표했다(관련기사 참조).
일부 엇갈린 견해가 있긴 했으나 ‘빠른 보상’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삼성전자와 가족대책위의 입장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반올림 측과는 이견이 크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반올림은 “구체적 사과부터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올림이 요구하는 사과는 ‘근로자가 병에 걸린 원인은 모두 삼성전자에 있다’고 인정하라는 강요다. 삼성전자는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산업재해보상보험이라는 사회 제도의 근간을 흔들려고 하지 않는 한, 국가 기관인 근로복지공단을 제쳐두고 개별 회사가 이를 직접 인정할 수도 없는 일이다. 삼성전자가 보상금 성격을 손해배상이 아닌 ‘회사 발전 기여에 관한 보답 차원’이라고 선을 그은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작년 권오현 삼성전자 대표 명의로 발표한 사과문 역시 인정이 아닌 위로 차원이었다.
보상 대상의 경우, 삼성전자는 자사 직원에 한정지은 반면 반올림 측은 모든 협력사까지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재발방지 대책에선 삼성전자가 대한직업환경의학회, 한국산업위생학회 전문가로 구성된 보건관리추진단을 구성하고, 고용노동부 모니터링 위원회를 외부감사기구로 삼겠다고 했다. 반올림은 외부감사기구 등에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등 노동계가 추천한 인물을 배치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사과와 보상, 재발방지 대책 모두 삼성전자와 반올림의 견해차는 컸다. 이를 조정하는 것이 바로 조정위의 역할이다. 그러나 이날 조정위원 중 한 명인 백도명 교수의 발언은 한 쪽으로 치우쳐져 있었다.
백 교수는 조정 현장에서 “사과는 진정성이 있어야 한다”, “구체적으로 해야 책임을 가릴 수 있다”, “왜곡이나 조작에 관한 사과를 해야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어눌한 말투에 주변 기자들을 의식해서인지 상당히 우회적인 표현을 사용했지만 내용 자체는 반올림의 주장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특히 ‘왜곡과 조작’은 반올림 측 일방적 주장인데도 그는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백 교수는 “회사 발전 기여에 관한 보답 차원에서 보상을 하겠다고 했는데, 협력사는 (삼성전자 발전에) 기여하지 않은 것인가”라며 보상 대상을 자사 직원으로 한정짓겠다는 삼성전자를 비꼬기도 했다. 반면 반올림 측에는 “삼성이 사과를 한 이후에도 계속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나” 등 유리한 답이 나올 수 있는 질문으로 일관했다.
백 교수가 “(이 사안이 불거진 이후로) 삼성에서 인재 사고와 관련해 달라진 점을 찾지 못하겠다”고 말하자 백수현 삼성전자 전무는 “부족한 점이 있다면 저희가 고쳐나가겠다”고 말했다. 꾸짖고, 사과하는 모양새로 이미 ‘조정’이 아니었다. 심판이 링 위로 올라와 한 쪽 선수에 어퍼컷을 날리고 무릎을 꿇린 격이다.
당초 백도명 교수의 삼성 직업병 조정위원 추천을 놓고 일각에선 ‘편파구성’ 논란이 일었다. 제대로 조정을 할 수 있겠느냐는 우려도 있었다. 결국 이는 현실이 됐다.
백 교수는 정부 역학조사 결과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장의 백혈병 발병률 등이 통계적으로 무의미하다는 점을 알고 있으면서도 꾸준하게 문제제기를 해 온 인물이다.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삼성전자는 백 교수가 조정위원이 되는 것에 고심을 거듭한 것으로 전해진다. 백 교수는 과거 삼성 반도체 사업장에서 ‘벤젠이 검출됐다’는 왜곡된 사실을 외부로 흘려 논란을 낳기도 했다. 반올림은 이날 발표자료에도 이 왜곡된 자료를 근거로 들어 마치 삼성전자 공장에서 발암물질이 나왔다는 식으로 사실을 호도했다. 당시 검출됐다는 벤젠은 작업자에 영향을 미치는 공기 중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사람 손에 닿지 않는 감광액 시료에서 나온 것이다. 설사 이 시료가 사람 손에 닿는다 하더라도 검출량은 휘발유의 1000분의 1 수준(0.08~8.91ppm, 담배 한 개비의 벤젠 검출량은 62ppm)의 극미량이어서 인체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한국화학연구원, 한국산업기술시험원, 한국화학시험연구원, 미국 발라즈 등 4개 분석기관이 동일한 시료에 대해 조사를 실시한 결과 벤젠은 전혀 검출되지 않았다.
다음 조정은 비공개로 진행된다고 한다. 기자들에게 완전 공개된 자리에서도 편파적 성향을 드러낸 백 교수가 비공개석상에선 어떤 식으로 조정을 진행할 지 직접 보지 않아도 뻔하다. 조정위원장인 김지형 변호사는 과거 조정위원 편파구성 지적에 대해 “그런 것은 앞으로 해결해나가야 될 부분인 것 같다”고 말한 바 있다. 편파 논란이 계속된다면 조정위원을 바꿔야 할 것이다.
<한주엽 기자>powerusr@d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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