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로(岐路). 갈림길 내지는 어느 한쪽으로 결단내야 하는 상황을 이른다. 최근 위기론에서 쉬이 벗어나지 못하는 삼성전자의 형편과도 맞닿아 있다. 표면적으로는 HBM 경쟁 주도권에서 뒤처진 것이나, 내부적으로는 의사결정 체계의 문제까지 거론된다. 위기를 딛고 진정한 '뉴삼성' 시대로 가기 위한 쇄신을 모색할 시점이다. <편집자주>
[디지털데일리 고성현 기자] 부진한 반도체 부문 실적과 가전 경쟁력 하락 등에 따라 삼성전자의 조기 인사 단행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통상 12월 초에 진행했던 임원 인사를 이달 중으로 앞당겨, 위기에 봉착한 사업 조직의 동력을 회복하겠다는 의지다. 반도체 부문 내 사업부장 및 임원의 대대적인 교체 가능성이 대두되는 가운데, 문제로 지적받았던 보고라인 개선과 조직 문화 회복을 위한 개편이 진행될지도 관심사다.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빠르면 다음주 내로 사장단 인사를 단행할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삼성전자는 11월27일 정기 사장단 인사를, 이틀 뒤 29일에 임원 인사를 단행한 바 있다.
빠른 인사 교체가 예상되는 이유로는 반도체 사업 부문의 부진이 꼽힌다. 차세대 메모리로 꼽히는 고대역폭메모리(HBM) 주도권을 SK하이닉스에 내준 가운데, 핵심인 D램 공정 안정화 측면에서도 마이크론·SK하이닉스보다 늦어지면서 주력 경쟁력이 낮아지고 있다는 위기감이 높아지고 있어서다. 모바일과 가전 사업을 영위하는 디바이스경험(DX)부문에서는 비교적 선방한 실적을 내놨으나, 중국의 거센 추격과 벌어지는 애플과의 격차, 국내 경쟁사인 LG전자와의 점유율 격차 등이 위기 요소로 거론되고 있다.
올해 들어 삼성 내 위기론이 커지면서 반도체 사업에서는 올해 5월 부임한 전영현 DS부문장을 제외, 나머지 사장직이 전면 개편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DS부문 사업부장들이 선임된지 3~4년여가 흘렀으나, 사업 실적 및 전망이 악화되면서 뚜렷한 사업·기술적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어서다. 이정배 메모리사업부장과 최시영 파운드리사업부장은 지난 2020년 말 선임됐으며, 시스템LSI사업부장을 맡는 박용인 사장은 2021년 말 선임된 바 있다. 신규 사업부장 후보로는 한진만 DS부문 미주총괄 부사장, 남석우 DS부문 제조&기술담당 사장 및 외부 인사 영입 등이 거론되고 있다.
이밖에 사장급 인사인 사업부장 외 고위 임원진은 물론, 차장·부장급(CL3) 기준 쇄신도 이뤄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40대 차·부장급 직원 대상으로 희망퇴직을 받고 있다는 소식마저 흘러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이는 관리직 및 임원의 고령화에 따른 의사결정 속도 저하와 더뎌진 기술 속도 개발을 혁신하기 위해 조직 규모를 축소하고 효율화하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전영현의 '토론 문화 재건' 핵심은…조직 문화 개선·통합에 초점
이와 더불어 대대적인 조직 개편도 병행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미 전영현 DS부문장은 반도체연구소의 메모리 중심 연구개발(R&D) 조직을 대거 사업부로 전진배치하고, 파운드리, 시스템LSI 및 일부 인원을 메모리사업부로 이동시키는 등 일부 조직 개편을 단행한 상황이다. 또 평택, 미국 등 일부 파운드리 팹의 투자나 설비 효율화까지 진행하면서 HBM 추격을 위한 메모리 개발 집중에 힘을 싣고 있다.
이번 인사 개편을 통해 위기론이 불거졌던 DS부문 내 기술 개발 속도의 장애물이 사라질 수 있을지 주목된다. 특히 조직 내 성과 중심 개발로 인한 부서이기주의, 이로 촉발된 신기술·신제품 개발부서의 동력 상실 등을 어떻게 해결하느냐가 핵심이다.
전 부문장은 조직 내 부서이기주의 타파를 위한 메시지를 여러차례 내놓은 바 있다. 근원적 경쟁력 회복이라는 목표 아래 새로운 조직문화인 코어(C.O.R.E) 워크를 조성해 리더·부서 간 소통의 벽을 없애고, 치열한 현장 중심 토론 문화를 재건하겠다는 목표다. 또 지난달 8일에는 3분기 실적 발표 이후 이례적으로 사과문을 공개하며 "삼성의 전통인 신뢰와 소통의 조직문화를 재건하고, 현장에서 문제점을 발견하면 그대로 드러내 치열하게 토론해 개선하도록 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내기도 했다.
특히 지난해부터 화두가 된 HBM, D램에 대한 경쟁력 회복을 위해서는 조직 응집력을 높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삼성전자 내부 사정에 정통한 한 업계 관계자는 "HBM과 관련해서는 각 부서별 성과에만 매몰하다 보니 잘못한 부서는 없고 결과물만 좋지 않게 나오는 아이러니한 현상이 만들어졌다. 그러다 보니 이에 대한 원인을 찾고 개선하는 속도도 느려지게 된 것"이라면서 "HBM은 근본적인 D램의 설계와 생산 수율 안정화부터 소재, 패키지 기술, 공정개발 등이 모두 결합돼 있다. 이를 진행하는 실무자 간 소통과 협업이 원활하게 이뤄져야만 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일부 사업부에 한해서는 메모리 중심 내부 인사가 아닌 외부 인사를 영입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파운드리나 시스템LSI 등 시스템반도체는 대량양산·원가 절감에 방점이 찍힌 메모리와 다른 구조를 지닌 만큼, 관련 분야에 대한 전문가를 적극적으로 영입해 사업 방향성을 전개해야 한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삼성전자의 국내 입지와 모바일 등 타 부서 간 사업 연계 상황을 고려했을 때, 모바일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 설계와 파운드리 공정은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영역 중 하나"라며 "내부 인력 풀에 한계가 있다면 외부에서 전문가를 영입해 개발을 주도하고, 생태계 범위를 넓히는 등 메모리 대비 폭넓은 시도를 하는 것이 좋은 방향이 될 수 있다"고 전했다.
◆'서초 보고라인' 간소화 핵심…"때늦지 않은 결단 필요"
미전실 해체 이후 삼성전자의 컨트롤타워 역할을 해온 사업지원TF의 혁신이 이뤄질지도 주목된다. 정현호 부회장이 중심인 사업지원TF가 기술 개발, 사업 방향성, 업무 효율화 등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면서 위기론이 커지고 있다는 지적이 커지고 있어서다. 실제로 삼성 내부에서는 '서초'로 칭하는 사업지원TF에서 실제 현장과 동떨어진 성과 보고 및 괴리가 발생, 사업 진행의 속도와 진척 효율성이 떨어뜨리고 있다는 비판이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수년 간 추진해왔던 대규모 인수·합병(M&A)이 진행되지 않는 것에 대한 원인으로 사업지원TF를 지목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삼성전자는 2017년 하만 인수 이후 성장동력 확보를 위해 여러 인수대상자를 찾아왔으나 현재까지도 마땅한 성과를 내놓지 못하고 있다. 이에 사업지원TF가 재무적 부담과 미진한 전략 방향성으로 인해 재빠르게 결정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의구심이 제기된 것이다.
이에 따라 새로운 그룹 컨트롤타워를 새롭게 재정비해야 한다는 주장에도 힘이 실린다. 이찬희 삼성 준법감시위원회 위원장은 올해 초 "컨트롤타워가 없으면 효율성과 통일성 측면에서 문제가 나타날 수 있다"고 지적한 한편, 최근 발간한 준감위 연간 보고서에서도 "경영 판단의 선택과 집중을 위한 컨트롤타워의 재건, 조직 내 원활한 소통에 방해가 되는 장막의 제거, 최고 경영자의 등기 임원 복귀 등 책임경영 실천을 위한 혁신적인 지배 구조 개선이 있어야 한다"고 전했다.
다만 그룹 총수인 이재용 회장에 대한 사법 리스크가 지속되면서 파격적인 인적 쇄신이 이뤄지기 어렵다는 분석도 있다. 부당합병·회계 부정 혐의 재판 등이 진행 중인 터라 섣불리 나설 수 없는 데다, 아직 미등기임원인 탓에 적극적인 리더십을 펼치기 어려울 수 있다는 의미다.
업계 관계자는 "전문 경영인 영입, 이사회 독립성 강화, 이 회장 등기임원 복귀 등 여러 안이 나오고 있지만 어느 제안이나 장단이 명확해 쉽사리 결정하지 못할 것"이라면서도 "더 늦으면 성장 동력에 위협이 현실화될 수 있단 우려가 깊은 만큼, 현재 위기 불식과 미래 성장을 위한 확실한 쇄신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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