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데일리 박기록기자] 최근 신한은행은 총 3000억원 가량이 투입되는 차세대시스템 사업인 '더 넥스트(NEXT)'의 완료시점을 2024년 9월로 예고했다.
물론 신한은행은 2024년 9월이라는 완료시점을 '더 넥스트'사업 입찰 공고에 적시하지 않았다. 1단계 24개월, 2단계 42개월로만 명기했다.
프로젝트 착수하는 시점을 올 3~4월쯤으로 봤을때, 42개월을 고려하면 2024년 9월경을 완료시점으로 추정할 뿐이다. 마침 2024년 9월14일부터18일까지 5일간의 추석 연휴가 예정돼 있다. 이 시기를 놓치면 2025년 1월 설연휴로 넘어갈 수 있다.
그런데 신한은행 '더 넥스트' 사업의 내용을 살펴보기에 앞서, 금융권 차세대 IT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좀 의아하게 생각해야 할 부분이 있다.
다름아닌 '42개월'이라는, 엄청나게 긴 프로젝트 개발기간이다.
그동안 은행, 보험사 등 대형 금융회사의 차세대시스템 프로젝트는 아무리 길어도 30개월(2년6개월)이 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최근 5년내 금융권 차세대시스템 개통 사례를 보면, 시스템 완성도의 미흡 등으로 우리은행, 삼성생명, 삼성화재, 교보생명 등 당초 예정했던 차세대 사업을 일정내에 사업을 못마쳐 몇 개월씩 연기된 사례는 있다.
교보생명의 경우, V3로 명명된 차세대시스템 사업을 2016년부터 2018년 11월까지 거의 3년간 진행했다가 추가로 10개월이 늘어난 2019년 9월에야 오픈했다. 개발 기간만 45개월 정도 걸린 셈인데 아마도 빅뱅 방식으로 진행된 국내 금융권 차세대시스템 프로젝트로서는 최장 기록일 것이다.
이처럼 당초 계획과 다르게 시스템 개통이 지연된 사례들을 제외하면, 신한은행은 통상적인 금융권 차세대 개발 기간보다 무려 1년 또는 1년6개월 가까이 길게 잡은 것은 의아스럽다. 과거에 비해 IT의 눈부신 발전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신한은행의 '더 넥스트' 사업은 앞서 언급한 과거 국내 금융권의 차세대시스템의 개발 방식과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신한은행은 과거의 '빅뱅'식 차세대시스템의 개발방식을 버리고, 단계적 개발방식을 채택했기 때문이다.
소위 '빅뱅'식 개발이란 대략 2년 정도의 개발기간을 정해놓고 특정일을 정해 한꺼번에 계정계, 정보계, 대외계와 관련한 모든 시스템을 일괄 변경하는 방식이다. 은행은 프로젝트 추진을 위한 1개의 주사업자를 정하면, 이 주사업자가 수많은 협력업체들과 컨소시엄을 구성해 프로젝트를 총지휘한다.
반면 '단계적 개발' 방식은 은행이 업무 혁신이 필요한 부문을 먼저 개발해 오픈하고, 비교적 시간이 오래 걸리는 업무는 그 일정에 맞게 천천히 오픈하는 방식이다. 은행은 각 사업마다 별도의 사업자를 선정하고 계약을 맺는다. 시티그룹 등 주로 글로벌 금융회사들이 채택하는 방식이다.
신한은행의 경우, 개발 규모가 적은 사업들은 24개월 일정으로 1단계사업을 진행하고, 규모가 큰 사업은 42개월 일정으로 2단계로 나눠 진행한다. 또한 5개 사업부문의 주사업자를 별도로 선정한다.
총 5개 사업중 1802억원 투입되는 '코어/디지털기반'영역과 263억원 투입되는 '마케팅 및 데이터 분석'영역은 42개월로 일정이 잡혔다. 반면 신대외계시스템, 단말UI 플랫폼 구축 등 3개 사업은 24개월내 개발을 완료하고 먼저 가동에 들어간다.
이같은 단계적 차세대시스템 개발 모델은 KB국민은행이 먼저 선보인 바 있다. 국민은행이 지난해 9월 오픈한 '더 K'프로젝트가 이런 방식으로 1, 2단계로 나눠서 진행됐다. 국민은행은 당초 예정했던 일정대로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다만 국민은행의 '더 K'프로젝트는 계정계시스템을 제외한 정보계시스템 위주의 차세대시스템 전환 사업이었기 때문에 개발 규모(1500억원), 사업 기간(1년6개월)등에서 신한은행과 직접 비교하기에는 차이가 있다.
◆'빅뱅식' 모델의 종언… 소환되는 금융권 차세대시스템 흑역사
신한은행이 이처럼 엄청나게 긴 일정을 잡고 차세대시스템 프로젝트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기존과 같은 '빅뱅'식 차세대시스템 개발 방식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리스크가 커졌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미 '빅뱅'식 차세대시스템 개발 방식에 대한 위험성은 최소한 7~8년 전부터 경고돼왔다. IT기술은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있는데 기존 특정 시점의 기술로 미래 10년에 대응하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에 대한 근본적인 모순이 지적돼왔지만 이를 과감하게 극복하는 모습은 나타나지 않았다.
여기에 더해 금융회사 CEO들이 빅뱅 방식이 가지는 프로젝트 관리의 편리함, 또 차세대시스템 전환 전후(Before & After)의 선명한 혁신 성과 업적에 대한 욕심이 제어되지도 못했다.
지난 20년간 국내 금융권에서는 수많은 '빅뱅식' 프로젝트가 진행됐지만 완료시점에서 갈등과 잡음이 발생하지 않은 경우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최근 5년내, 빅뱅 방식으로 진행된 국내 금융권 차세대시스템 구축 사례중 몇개를 살펴보자.
국내 최대 보험사인 삼성생명과 삼성화재는 지난 2015년 초부터 ERP(전사적자원관리)시스템 구축을 주내용으로 한 차세대시스템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당초 2017년4월 오픈을 목표로 했지만 시스템 완결성에 대한 문제 때문에 2017년 10월로 가동을 늦출 수 밖에 없었다.
6개월간 프로젝트가 연장되면서 삼성생명의 경우, 기존 1561억원에서 1921억원으로 사업비가 늘어났다. 삼성화재도 기존 1786억원에서 2581억원으로 사업비가 추가로 증가했다. 두 회사 합쳐 약 1000억원의 비용이 증가한 것이다.
'제조업에 강점을 가진 SAP의 ERP솔루션을 금융산업에 단기간에 무리하게 적용시킬 경우, 커스터 마이징에 적지않은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던 안팎의 우려가 실제로 현실화된 것이다.
만약 프로젝트 논의가 한창 뜨거웠던 2014년 여름으로 되돌아가, 삼성 경영진이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ERP의 금융업무 적용범위를 적게 가져가고, 단계적으로 그 영역을 넓혀가자'고 했다면 보다 긍정적인 결과를 낳았을지도 모른다.
2018년 2월, 우리은행은 설연휴를 이용해 차세대시스템으로 전환하기위해 대고객 공지문까지 돌렸으나 대외계시스템의 일부 설계 하자가 발견돼 결국 차세대시스템 전체의 전환 계획을 보류해야 했다. 결국 우리은행은 3개월뒤인 2018년 5월 연휴를 이용해 차세대시스템 가동에 들어갈 수 있었다. 물론 시스템 가동 후에도 몇번의 장애가 발생해 대외 신뢰에 타격을 입었다.
우리은행의 경우, 차세대시스템의 완성도가 미흡했던 근본적인 몇가지 이유들이 제시됐다. 2년여의 차세대시스템 개발 기간동안, 잦은 개발 요건의 추가가 있었으며 이로 인해 시스템의 완성도를 충분히 테스트할 시간을 확보하지 못하는 악순환을 낳았다는 문제점이 지적됐다.
차세대시스템 개발 당시 우리은행은 '위비뱅크'를 앞세워 국내 은행권의 모바일뱅킹 서비스를 주도하고 있었고, 이 때문에 당초 차세대시스템 개발 예정에 없었던 디지털부문에서 대한 개발 요건이 지속적으로 추가됐다는 것.
어떻게보면 우리은행의 사례는 국내 금융권의 빅뱅식 차세대시스템 개발 방식에서 가장 흔하게 나타날 수 있는 리스크라고 볼 수 있다.
기술과 시장환경은 계속 바뀌는데, 특정 시점의 기술력과 자원, 개발 비용을 미리 정해놓고 ICT 사업을 추진하다보니 추가되는 개발 요건에 대해 취약점이 노출되는 것이다.
개발요건이 추가로 늘어나면 기간과 비용도 동시에 증가시키는 것이 상식이지만 그런데 이는 현실적으로 허용되지 않는다. 결국 이같은 빅뱅식 추진 방식은 결과적으로 스스로를 가둬놓는 상황을 초래했다.
◆영원한 미완성 '파밀리아 성당', 어쩌면 그게 정답일수도
'과연 42개월내에 다 끝마칠 수 있을까.'
어떻게보면, 신한은행이 제시한 '더 넥스트'사업 기간 42개월도 보기에 따라서는 많은 상상의 여지를 남긴다.
긍정적으로 보자면, 신한은행은 앞서 제시한 금융권 빅뱅식 차세대시스템 사업의 기술 및 시장 측면에서의 리스크를 어느 정도 담아낼 수 있는 시간적 범퍼링(완충) 갖겠다는 의도로 보인다.
먼저, 기술적으로는 클라우드로 전환하기 위한 전단계로서 계정계 주전산시스템에 적용할 x86의 안정성을 비교적 충분히 테스트해볼 수 있는 시간이다.
또한 시장변화 측면에서 보면, 급격하게 진행되고 있는 금융권 시장 변화에 대한 유연한 대응이다.현재로선 국내 금융권의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의 그림이 어떻게 나오게될 것인지 판단하기 쉽지 않은 시점이다. 따라서 42개월간 충분하게 사업기간을 설정해놓고 이를 '더 넥스트' 사업에서 수용하겠다는 전략으로도 읽힌다.
네이버, 카카오, 토스 등 빅테크 기업들의 사실상 금융시장 진출이 가시화되고 있다. 그런 만큼 신한은행이 기존의 금융시장 논리를 뼈대로 섣불리 차세대시스템을 구상하는 것은 그 자체로 리스크가 크다고 생각할 수 있다.
실제로 신한은행측은 <디지털데일리>가 '더 넥스트' 사업의 최종 완료시점을 묻는 질의해 대해 "단계적 이행을 목표로 검토하고 있고, 구축 일정은 RFP(제안요청서)를 통해 공개될 예정"이라며 "향후 선정 업체와 추가적인 협의를 통해 이행 일정을 확정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엄밀하게 말하면, 신한은행의 '더 넥스트'는 사업의 최종 완료 시점은 유동적이다. 상황에 따라서는 2025년 이후로 넘어갈 수도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제 그러한 전략적 '모호함'이 어쩌면 더 합리적인 선택이 될 수 있는 상황이 됐다는 점이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명물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은 여전히 건축되고 있다. 최초 설계자 가우디가 사망한지 100년이 다 돼가지만 여전히 건축되고 있으며, 아무도 그 완료시기를 가늠할 수 없다. 어쩌면 영원히 미완성으로 남을 수도 있다.
그런데 이제는 금융 시스템도 어쩌면 혁신은 지속적으로 하되 영원히 미완성일 수 밖에 없다는 관점의 차이로 이동할 시점이 된 듯하다.
신한은행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더 넥스트' 사업은 어쩌면 그런 점에서 지난 20년간 국내 금융권 차세대시스템 사업에서 발생한 수많은 오류과 실패를 극복할 해법을 담고 있는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