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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IT보복' 대응 수단이 국산화?… ATM 국산화의 아픈 기억

사진은 본문의 내용과 관계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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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얕은 수', 강대강 대응은 불필요

[데스크 칼럼 = 박기록 부국장] 일본 경제산업성은 지난 1일, 반도체 소재 3개 품목에 대한 한국 수출 규제 강화 조치를 공식발표했습니다. 일본 정부는 '화이트 리스트' 대상인 27개국에서 한국을 제외시켜 매 건마다 일본 정부의 승인을 받도록 하겠다는 것입니다.

한국의 주력 IT제품인 반도체, 디스플레이 분야에 직접적인 타격을 주겠다는 의도입니다. 하지만 정치의 문제, 나아가 역사의 문제를 경제 문제로 덮어씌우려는 일본 아베 정권의 전략은 결론적으로 그 수가 너무 낮아 보입니다. "참의원 선거를 압두고 아베 총리가 지지세 결집을 위해 무리수를 뒀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습니다.

일본 내부에서도 비판이 커지자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는 2일,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세계무역기구(WTO)의 규칙에 위반하지 않는다'는 취지로 조치를 정당화했습니다.

그러나 WTO 제소로 이어진다면, 일본이 패소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베 총리는 '국가와 국가의 신뢰관계로 행해온 조치를 수정한 것'이라고 말했는데, 이미 이 발언 스스로가 WTO 원칙과 충돌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아베 총리가 말한 '국가와 국가의 신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분명한 것은 아베 총리의 발언과 '3개 품목의 수출 제한'의 직접적인 연관관계, 즉 인과성이 없다는 점입니다. WTO의 기본 원칙중 하나가 '상호 호혜와 국제무역의 차별대우 폐지' 입니다.
WTO는 국가간 보복 조치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상당성을 갖췄을때만 엄격하게 허용됩니다. 이를테면 자국 제품이 상대국으로부터 불합리한 대우나 시장 차별조치를 받았다고 인정됐을 경우만 가능합니다. 따라서 일본의 '3개 소재 제품의 수출 제한'은 한국이 아무런 액션이 없는 상황에서 이뤄졌기 때문에 WTO의 입장에서보면 뜬금없는 조치입니다.

이런 가운데, 국내 일각에선 이번 기회에, 관련 소재의 국산화 기회로 삼자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정말 걱정이되는 것은 이 부분입니다. 냉정하게 말하면, 이는 현실적인 주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소재(부품)의 국산화'는 쉽지 않은 과제이기도 하고, 또한 불필요한 생각이기도 합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제품을 국산화할 필요는 없습니다. 기술적인 문제 때문에 국산화를 못하는 경우도 있지만 국산화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국산화를 포기한 사례가 사실은 훨씬 더 많습니다. 냉정하게 보면, 일본이 이번에 수출 제한을 한 3개 제품도 사실 우리 입장에서는 국산화의 필요가 없는 품목입니다. 국산화해봤자 결국은 시장성의 부족, 규모의 경제(Scale of Economy) 딜레마에 빠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미국 NASA가 쏘아올린 우주 왕복선의 수많은 부품들중 일본 제품의 비중이 적지않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는 일본의 소재(부품)기술력이 좋다는 의미도 있지만 경제성 때문에 미국이 굳이 일본 제품을 대체하기위해 따로 개발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쯤에서 좀 아픈 기억을 소환해야할 것 같습니다. 한국 기업이 일본의 기술 종속성에서 벗어나기 위해 '국산화'를 이뤘던 여러 사례들중, IT분야에서 거의 유일하게 기념비적인 업적이 하나 있습니다. ATM(금융자동화기)가 그것입니다 .

지난 2007년, 당시 치열하게 경쟁해왔던 한국의 금융자동화기기 3사(노틸러스효성, 청호컴넷, LG엔시스)는 오므론, 히다찌 등 일본 ATM 제조사들로부터 ATM의 핵심 부품을 대체하기 위해 이를 국산화하기로 결의했습니다.

당시 ATM 한 대 가격이 2500만원~3000만원 수준이었는데, ATM 탑재되는 핵심부품인 환류식 모듈(BRM)이 원가의 60% 이상을 차지했습니다. 만약 BRM 모듈을 국산화한다면 연간 2000억~2500억원 수준의 수입대체 효과가 예상됐습니다. 취지에 공감한 정부로부터 적지않은 국산화기술 정책 자금을 지원받아 3사가 공동으로 기술 개발에 들어갔고, 결국 2년여 뒤인 2009년말 국산화에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그뿐이었습니다. 국산화에는 성공했지만 정작 시장은 없어졌습니다. ATM의 수요가 변곡점을 지나 이미 쇠퇴기기 접어들고 있었습니다. 국산화의 기쁨도 잠시, ATM가격은 이후 계속 추락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거의 현금을 사용하지 않는 세상입니다. 은행들은 ATM 자동화코너를 줄이고 있습니다.

10년이 지난 지금, 시장의 지형도 많이 쓸쓸해졌습니다. LG엔시스는 2013년 LG CNS로 편입됐고이어 2017년9월 코스닥 기업인 에이텍에 매각됐습니다. LG전자에서 시작된 ATM 사업은 결국 이렇게 막을 내렸습니다.

청호컴넷도 자체 브랜드는 살았지만 2011년 5월, 또 다른 금융자동화기기 회사인 FKM과 합병했습니다. 그런데 인수합병이후 청호컴넷의 생산 라인은 FKM으로 대체됐습니다. FKM은 일본 후지쯔기전이 국내에 출자한 기업이었기때문에 당시 ATM 국산화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FKM이 제조라인을 맡게되면서 국산 ATM 모듈은 유명무실해졌습니다.
사진은 본 기사와 관련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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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틸러스효성은 '조현준 체제'로 그룹이 재편되는 과정인 2018년5월에 효성TNS로 사명을 바꾸었습니다. 그나마 이 회사는 해외 ATM 사업에서 견실한 실적을 올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노틸러스효성 역시 국산 환류식 모듈을 탑재한 고급형 ATM이라기보다는 CD기 비중이 높습니다. 환류식 ATM 자체가 지폐 사용량이 많은 한중일 동양 3국에 특화된 기능이라는 점에서 동양권을 벗어나면 환류식 ATM의 수요가 많지 않은 것도 이유입니다.

결국 'ATM 국산화'는 기술적으론 일본 제품을 대체했으니 '실패'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장의 흐름을 읽지 못했으니 이 역시 '성공'이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비록 최근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상황들때문에, IT 국산화에 대한 필요성은 공감하지만 그렇다고 함부로 움직일 정도로 간단한 문제가 아님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종합적으로 상황을 판단해보면, 일본 아베 정부는 조만간 출구전략을 마련해 치고 빠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선거를 앞둔 아베 진영이 노리는 것은 극렬한 한국에서의 반일시위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 내부적으로도, 국가적 이익보다는 정파적 이익을 앞세워 지나치게 사안을 호도하거나 위기감을 고조시켜 시장 불안을 야기하는 것 또한 경계해야합니다. 2일 코스피 시장에서 정작 반도체 관련주들은 국내 언론의 호들갑이 무색하게 안정적인 흐름을 보였습니다.
경제학의 기초적인 개념중 하나가 '안정'과 '불안정'입니다. 지금 상황을 '안정'으로 보느냐 '불안정'으로 보느냐에 따라 시장의 대응이 180도 달라집니다. 최근의 상황은 인위적으로 조성된 불안정(Unstable)이기때문에 곧 안정 상태로 회귀할 수 밖에 없습니다. 시장의 힘을 믿고 차분하게 대응하는 것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박기록 기자> rock@d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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