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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수첩] 삼성전자 직업병 조정위원회, 무엇을 조정했나?

[디지털데일리 한주엽기자] 7월 23일 오후. 서대문 소재 법무법인 지평의 대회의실은 삼성전자 직업병 조정위원회의 중재권고안 발표를 듣기 위해 몰려든 취재진으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협상 당사자인 삼성전자, 삼성직업병가족대책위원회, 반올림 측은 일찌감치 자리에 앉아 조정위원회가 들어오길 기다렸다. 발표를 기다리는 각 측은 여느 때와는 달리 가벼운 목례도 하지 않았다. 긴장된 분위기였다.

조정위원장인 김지형 변호사(전 대법관)와 조정위원인 정강자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초빙교수, 백도명 서울대 환경보건학과 교수가 회의실로 들어오자 카메라 플래시가 쉴 새 없이 터졌다. 자리에 앉은 김지형 변호사는 고개를 살짝 숙인 채 마이크도 없이 24쪽 분량의 조정권고안과 조정조항을 작은 목소리로 무려 한 시간 동안 쉬지 않고 읽어나갔다. 그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다. 취재 기자들은 고개를 돌려 귀를 쫑긋 세우고 김 변호사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애를 썼다. 그러나 그가 단순히 원고를 ‘낭독’한다는 사실을 인지한 이후부턴 대부분 받아적기를 포기했다. 하품을 하는 이도 있었다. 김 변호사는 권고안 낭독 중간 물 한 모금 먹을 때를 제외하곤 자세를 흐트러트리지 않았다. 그가 물병을 집어드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 카메라 플래시가 연신 터졌다. 권고안을 다 읽은 김 변호사는 “10일 내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면 이를 수용한 것으로 보겠다”고 말한 뒤 일체의 질문을 받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불만의 목소리가 들렸다. “읽고 나갈거면 왜 불러모았나”라는 것이다. 그날 김 변호사는 마치 법정의 재판장 같았다. 아직도 본인이 대법관인줄 착각했을까? 아니다. 강제성 없는 권고안에 사회적 권위를 더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가 속한 법무법인 지평 역시 이번 일을 계기로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인지도가 상당히 올라갔다.

삼성전자는 우려를 표했다. “권고안 내용 중에는 회사가 여러 차례에 걸쳐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밝힌 내용이 포함돼 있어 고민되는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피해 당사자라 주장하는 삼성직업병가족대책위도 “당사자 협상이 우선”이라며 조정위 권고안에 이의를 제기했다. 이들은 “피해자와 가족들은 하루 빨리 보상받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세 곳의 협상 주체 가운데 한쪽은 우려, 한쪽은 이의를 제기했다. 조정위는 반년 넘는 기간 동안 무슨 조정을 했나? 혹시 반올림이 또 찾아와 지평 사무실 앞에서 시위 집회를 여는 것이 두려웠을까?

권고안은 대한민국 법질서를 흔드는 기가 막힌 내용들로 가득 차 있다. 인과 관계는 무시한 채 발병 대상자 전원에게 치료비 전액을 지원하고, 필요할 경우 추가 보상을 하라는 것은 현행 산업재해보상보험법의 근간을 크게 뒤흔들 여지가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조정위는 대상 질환이 ‘12개’라고 설명했지만, 사실상 무제한이다. ‘희귀암’에 포함된 두경부(頭頸部) 종양은 하나의 질병으로 인식될 수 있으나 뇌와 눈을 제외한 코, 혀, 입, 인두, 갑상선, 후두, 침샘 등에 생기는 모든 암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두경부 종양으로 분류되는 갑상선 암은 2012년 기준 우리나라 전체 암 발병자 가운데 20% 가까이를 차지하고 있다. 일단 병에 걸리면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삼성전자가 다 책임을 지라는 식이다. 대상 질환에는 불임도 포함돼 있다. 한 보건학 박사는 “백도명 서울대 환경보건학과 교수는 ‘불임’과 ‘피임’을 구별할 수 있나보다”라고 농을 던졌다.

조정위는 재발방지와 보상 작업을 수행할 공익법인 설립을 위해 삼성전자가 1000억원을 기부하라고 권고했다. 이 가운데 300억원은 운용자금으로 쓰겠다는 것이 조정위의 생각이다. 운용자금이 다 떨어지면 삼성전자가 다시 채워 넣으라고 조정위는 권고했다. 기업의 자금을 공돈 정도로 보는 모양이다. 게다가 공익법인 발기인은 진보 인사들로 하고, 이들이 뽑은 3명의 옴부즈만은 삼성전자를 상시적으로 감시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 권고안에 담겨 있다. 도대체 어떤 기업이 이런 권고안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이 권고안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인가. 당사자 보상을 위해 시작됐던 논의가 이런 식으로 결론난다면, 차라리 하지 않는 것이 나을 것 같다.

<한주엽 기자>powerusr@d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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