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데일리 박기록기자] 예나 지금이나 금융권의 IT통합은 매우 어려운 문제다. IT통합 매뉴얼에는 없는 비례의 원칙, 배려의 원칙, 관용의 원칙과 같은‘불문율’이 적용돼야하기 때문이다.
대강의 IT통합 방향성과 일정이 정해진다 하더라도 아주 디테일한 기술적인 문제에서 예상치 못한 분란이 발생할 수 있다. 여기에 통합된 IT직원들의 마음을 다치지 않게하는 정서적인 문제까지도 세심하게 고려해야한다. 최근 관심을 모으고 있는 외환-하나은행간의 IT통합 논의도 본질적으로는 이 프레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으로 본다.
지난 IMF 외환위기이후 수많은 금융권 구조조정과 IT통합의 역사를 살펴보면, IT통합은 ‘물리적인 통합’에 이은 구성원들의 ‘화학적인 결합’에 이르기까지 7~8년의 긴 시간이 필요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여전히 10년이 넘는 긴 시간이 흘렀음에도 당시의 갈등구조에서 탈출하지 못하는 대형 금융회사도 있다.
핀테크 시대를 살아가는 일반인들의 눈에는 ‘주전산시스템의 전원 플러그를 어느 쪽에 꼽느냐가 뭐 그렇게 중요한 문제냐’고 의아하게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건 여전히 누구에겐 자존심의 문제이고, 나아가 절실한 생존의 문제일 수 있다.
하지만 불편한 분위기 속에서도 IT통합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낸 금융회사들은 시간이 흘러 긍정적인 결과를 이끌어냈다. 그러한 사례들중 하나를 얘기하고자 한다.
시간을 거슬러 15년전인 지난 2000년, 국내 금융계에서 매우 드라마틱했던 IT통합 성공사례가 있다.
1999년 3월, 금융 및 기업 대규모 구조조정을 통한 IMF체제 탈출을 시도했던 DJ정부는 협동조합개혁안을 마련했다. 이 개혁안에 따라 2000년 7월1일을 목표로 농협, 축협, 인삼협(이하 삼협) 3개 기관의 통폐합을 시도하게 된다.
당연히 IT통합 시나리오도 뒤따른다. 1년여의 치밀한 사전준비 끝에, 2000년 7월부터 2000년 12월말까지 불과 6개월만에 IT통합이 전격적으로 이뤄진다. 더욱이 3개의 기관이 모두 중앙회와 회원조합으로 이원화된 조직 구성의 특성까지 고려하면 사실상 6개 기관의 IT를 동시에 통합한 전무후무한 작업이었던 셈이다.
당시 금융권의 살벌한 구조조정 여진히 계속되던 탓에 농·축·삼협의 IT통합은 다른 현안들에 밀려 당시에도 크게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IT통합의 치밀한 준비과정과 전광석화 같은 이행, 깔끔한 마무리, 그리고 합병대상 IT직원들에 대한 세심한 배려는 앞으로도 기억하고 재조명해야할 소중한 유산이다.
당시 IT통합단장으로 농·축·삼협의 IT통합을 진두지휘했던 김광옥 숭실대 금융IT학과 겸임교수(전 농협중앙회 CIO 및 IBK시스템 대표)는 IT통합 성공배경과 관련, “명확한 IT통합 플랜(시나리오)를 만들고, 조직 구성원이 목표를 분명하게 공유했기 때문”이라고 회상했다. IT통합에 있어 리더십이 중요하다는 설명이다.
이어 김 교수는 “얼마나 치밀하게 준비하느냐, 모든 돌발상황에 얼마나 신속하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IT통합은 성공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의외로 빠른 시간내에 IT통합작업을 완료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그는 “실제로 IT통합에 들어갔는데 당시 축협의 신용카드 IT업무 담당자가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았다. 결국 퇴직한 직원을 수소문했다. 이런 우여곡절끝에 IT통합을 성공할 수 있었다”고 소개했다.
◆치밀한 사전준비, ‘IT통합은 복잡함을 과감하게 단순화시키는 것’ = 겉으로 보면 IT통합은 두 개, 또는 그 이상의 개체들을 단순히 하나로 합치는 물리적인 행위에 불과할 뿐이다. 하지만 그 과정을 들여다보면, 상당히 세밀하고 복잡한 소프트웨어적인 접근이 요구된다.
당시 농·축·삼협의 IT인프라 규모는 차이가 많이 났다. IT통합과 관련, 당시 삼협은 규모 자체가 영세했기 때문에 크게 고심할 상황은 아니었지만 축협의 IT인프라는 그렇지 않았다. 외형적으로는 농협의 IT인프라 규모가 축협보다는 훨씬 방대했지만 외형에서 차이가 난다하더라도 전산시스템의 운영 범위와 기능, 역할, IT조직의 구성 등은 본질적으로 농협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농협과 축협의 전국 단위조합까지 포함하면 고려해야할 전국 네트워크가 5천개소가 넘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국내 최대의 금융네트워크 조직이었다.
농협은 IT통합에 앞서, 일단 축협의 IT자원을 사전에 철저하게 파악하는데 주력했다. 사전 체크 리스트를 통해 IT통합 과정에서의 ‘불안(리스크)요인’이 도출됐다.
당시 농협중앙회측이 정부에 요청한 IT통합비용은 763억원, 소요인력은 3600 M/M(Man/Month)으로 산정됐다.
앞서 농협은 1999년6월 IT통합 실무작업추진준비반 구성, 그해 11월 설립실무작업추진단 발족과 함께 농, 축, 삼협을 대상으로 한 전산운영실태 조사를 진행했다.
그리고 밀레니엄을 불과 3일 앞두고 Y2K 이슈로 전산본부의 어수선함이 극심했던 1999년 12월 27일에 IT통합계획이 최종 수립됐다. 전산센터, 시스템, 영업점 전산기기, 상품, 업무 등 통합 대상별 기본방향이 최종 설정된 것이다. IT통합의 혼선을 피하기 위해 중앙회 조직과 회원조합의 IT통합 일정은 1개월간의 시차를 뒀다.
당시 농협 내부 보고자료에 따르면, 농협의 전산시스템 규모는 축협보다 주컴퓨터 용량과 자동화기기 규모는 9배 더 컸지만 협동조합간 이기종 전산시스템을 운영하고 있어 IT통합의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예상됐다.
특히 중앙회, 회원조합 전산시스템은 별개의 업무시스템으로 구성됐기 때문에 경제, 신용, 공제업무 등 전산화 범위가 다양해 전산통합 개발 및 이행이 은행 합병 경우 대비해 2배 이상의 개발인력과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했다.
이와 함께 농협은 IT통합 과정에서 리스크 요인을 미리 계산하고 그에 맞는 돌발상황에 대비한 비상계획도 마련했다.
◆IT통합? “대승적 IT조직 통합이 먼저” = ‘통합 농협’의 출범 예정일은 2000년7월1일. 논리적으로 보면 통합일에 앞서 IT통합 작업이 완료돼야한다.
하지만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사전에 IT통합 작업은 원활하게 진행되지 못했다. 당시 농협측은 IT통합을 성공시키기 위한 조건으로 몇가지를 꼽았다. 가장 먼저 꼽은 것은 ‘사람’이다.
당시 농협의 내부 보고서에서 ‘축협 전산 요원의 적극적인 참여 없이는 IT통합 추진이 불가하다’는 점이 강조돼있다. 전산통합 개발을 효율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는 전산 조직의 선통합이 필요하다고 보왔다. 이는 ‘IT통합은 결국 IT조직을 끌어안는 작업’이라는 본질을 정확히 꿰뚫어 본 것이다.
실제로 농협 IT통합팀은 ‘통합 농협’ 출범을 앞둔 2000년 2월과 3월, 축협 전산센터를 방문해 IT통합을 위한 자료를 요청했지만 거부당했다. 당시 통폐합에 반발하는 축협의 저항이 거셌기때문이다. IT인프라의 운영실태는 물론이고 서면자료 자체도 없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물론 반발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지만, 막상 축협 직원들의 저항이 거세지자 당초 목표로 정했던 2001년1월 보다 IT통합을 3개월 더 앞당겨 합병 효과를 조기에 달성하겠다고 했던 농협의 계획도 물거품이 됐다.
결국 농협은 이때 비상계획을 마련했다. 전산센터 집단행동 발생시 금융거래 중단및 결제시스템 마비로 금융 대혼란이 유발될 수 있다는 최악의 상황까지 가정했다. 이어 축협의 돌발사태에 대비한 축협 전산센터 접수방안 및 추진계획도 수립됐다. 농림부, 금감원, 경찰청 등 관련기관에도 유사시의 협조사항을 요청했다. 하지만 우려했던 비상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IT조직을 끌어안는 노력이 병행됐기 때문이다.
◆짧았지만 긴 6개월의 여정 = 2000년7월, 예정대로 '통합 농협'이 공식 출범했다. 하지만 IT통합은 여전히 난제에 봉착한 상황이었다. 농협측은 축협과의 통합으로 '잠정 전산통합시스템'을 2001년 1월까지 약 6개월간 운영할 계획이었지만 IT통합에 실패하면 이 기간이 훨씬 더 늘어날 수 있고, 고객들의 불편은 그만큼 더 길어질 수 있다.
잠정 통합시스템은 IT통합전 협동조합간 전산시스템을 연결해 일부 상호 온라인거래를 가능하게하고 통합계좌관리를위한 최소한의 조치다. 완벽한 통합이 미뤄지고 이원화된 상태로 운영되기 때문에 업무의 비효율이 계속되고 내부 관리상의 문제가 축적된다.
그러나 IT통합의 고민은 IT조직 통합에 속도를 내며서 실마리를 찾기 시작했다. 2000년9월, 추석 연휴를 기해 농,축협 전산요원의 원할할 업무 협의를 위해 아예 전산요원의 근무 장소를 통합시킨 것이다. 당시 축협 수원센터에 근무하던 IT직원들을 모두 서울 양재동 농협 전산센터로 출근하도록 했다. 김광옥 교수는 “스킨십을 통해 통합 농협의 일원임을 각인시켰다.막연한 고용불안을 해소해주기 위한 조치였고, 결과는 성공적이었다”고 말했다.
2001년1월26일, 설 연휴를 이용해 중앙회와 회원조합간의 완전한 IT통합이 완료됐다. 6개월의 짧지만 긴 여정이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렸다. 이후 국내 금융권 IT통합 사례에 있어서 농축협 IT통합은 중요한 벤치마킹 대상이 됐다.
<박기록 기자>rock@d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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