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1위 반도체 업체인 인텔은 최근 프로그래머블반도체(FPGA) 2위 업체인 알테라를 인수했다. 인텔이 내놓은 중앙처리장치(CPU)가 완성된 미술품이라면 FPGA는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은 ‘빈 종이’라고 말할 수 있다. FPGA에는 원하는 것을 그릴 수 있고, 마음에 안 들면 툴툴 털고 지웠다가 다시 그리는 것도 가능하다. 완성된 미술품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남 주거나 버려야 한다. 즉 주문형반도체(ASIC)는 한 번 생산하면 설계를 바꿀 수 없다. 처음부터 다시 생산하려면 시간도, 비용도 많이 든다. 그래서 시제품을 만들 때 FPGA가 활용되는 것이다. 삼성전자가 울트라HD(UHD) TV를 처음 내놓았을 때 그 속에는 일반적인 ASIC이 아닌, FPGA가 탑재돼 있었다.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TV 시제품에도 FPGA가 탑재됐다. 이 덕에 문제가 생기면 중간 중간 칩 기능을 업그레이드할 수 있었다. 그렇게 검증이 끝나면, 그 상태 그대로 ASIC을 생산하며 ‘양산’ 체제를 갖추게 된다.
FPGA는 이처럼 시제품 생산 용도로 쓰였던 탓에 시장 규모가 작았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는 ASIC의 영역으로 판매망을 넓혀가고 있다. FPGA는 ASIC과 비교했을 때 동작(클록) 속도를 높여도 전력 효율을 유지하는 것이 용이하다. 서버용 반도체로 제격이라는 의미다. 실제 지난해 마이크로소프트(MS)는 빙 검색 인프라에 FPGA를 활용할 계획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페이스북 역시 자사 데이터센터 인프라에 FPGA 도입을 적극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전방 산업의 상황을 보면, 스마트폰은 성장세가 꺾였고 PC, 태블릿은 이미 역성장을 기록하고 있다. 반면 서버 시장은 꾸준한 성장이 예상된다. 지난 1분기 인텔의 실적을 보면 서버 사업부의 영업이익은 PC 사업부의 이익 수준을 앞질렀다. 이제 인텔 내에서 돈을 가장 잘 버는 사업부는 PC가 아니라 서버다. 이런 상황에서 서버 칩을 사가는 많은 대형 고객사가 FPGA를 주로 탑재한다면, 인텔은 아마도 큰 위기를 맞이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파운드리 매출 증가, 자동차 시장 진입 등 다양한 이유가 있었겠으나 인텔이 167억달러(18조5000억원)라는 거금을 들여 알테라를 인수한 주된 이유는 바로 이 같은 ‘불안감’이었을 것이다.
최근 반도체 업계에선 굵직한 대형 인수합병(M&A) 소식이 연일 전해지고 있다. 네덜란드 NXP는 지난 3월 미국 프리스케일을 167억달러(약 18조5000억원)에 인수키로 했다. 인텔의 알테라 인수 발표 하루 전날인 5월 28일에는 싱가포르에 본사를 둔 아날로그 전문 반도체 업체 아바고테크놀로지스가 미국 통신 반도체 업체인 브로드컴을 370억달러(약 41조원)에 인수한다는 발표를 해 관심을 모았다. 최근 이러한 대형 M&A 사례가 늘어난 이유에 대해 전문가들은 전자 산업의 성숙, 이에 따른 고객수 축소 때문이라고 말한다. 결국 불안감이다. 물건을 팔 만한 대형 고객사의 숫자가 날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덩치를 키우는 이유는 바로 여기 있다. 한국의 반도체 대기업들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D램은 15나노가 원가절감의 마지노선이라는 견해가 많다. 15나노에 머무른 그 상황에서 중국 기업이 진출하면 어떻게 따돌릴건가. 불안감은 있나. 있다면 어떻게 해소할 건가. 분명한 건, 대형 고객사 숫자가 줄어들수록 매력적인 M&A 매물도 점점 더 줄어들 것이란 전망이다.
<한주엽 기자>powerusr@insightsemic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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