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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는 어떻게 소니를 눌렀나…비결은 SCM

[디지털데일리 한주엽기자] 삼성전자 TV가 일본 소니를 앞선다는 것은 “꿈같은 일”이라고 했다. 혹자는 “어이없는 소리 말라”거나 “목표가 가상하다”는 비아냥 섞인 말도 서슴지 않았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이런 얘기가 오갔다. 삼성전자 영상디스플레이사업부의 한 임원은
앞지른 지 벌써 5년이 지났지만 2000년대 초반 당시 소니는 넘을 수 없는 벽처럼 느껴졌다고 회고했다.

당시 삼성전자 TV는 2류였다. 베스트바이 등 전자제품 매장에 들어서면 1류로 손꼽히는 소니 TV가 소비자를 반갑게 맞이했다. 삼성전자 TV는 구석에 쳐박힌 신세였다. 브랜드 인지도가 떨어지는데다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전시돼 있으니 판매량에서 큰 차이가 날 수 밖에 없었다.

최대 수요처인 북미 시장은 특히 힘들었다. 2002년 북미 TV 시장에서 소니의 점유율은 40%에 육박한 반면 삼성전자는 5%에 그쳤다.

이런 삼성전자가 어떻게 소니를 이겼을까.

기술력과 품질, 디자인 경쟁력을 높이면서 혁신 공급망관리(SCM) 프로세스 기법을 도입한 것이 주효했다는 설명이다.

최지성 당시 부사장(디지털미디어총괄 영상디스플레이사업부장, 현 삼성전자 대표 부회장)은 TV 사업을 맡은 직후
선진 SCM 프로세스와 물류 시스템을 도입해 유통 고객과의 납기 약속을 지키고 재고를 최소화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전해진다.

모니터 사업에 적용했던 SCM 혁신 사례를 TV에 접목시키려 한 것이다.

최 부회장은 전무 시절인 1998년 모니터 사업을 담당하는 디스플레이사업부장을 맡으며 혁혁한 성과를 이뤘다.

당시 모니터 사업은 일주일에 가격이 1%씩 하락했고, 재료비가 80%를 넘기는 구조였다. 만들고 배에 실어서 미국으로 보낸 뒤 창고에서 한 달 이상을 보관하면 시장 가격이 재료비 수준으로 하락했다. 수요 예측이 정확하지 않아 더 팔 수 있는데도 생산분이 적어 판매 실기를 하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최 부회장은 사업부 단위로는 최초로 선진 SCM 프로세스와 IT 정보 시스템을 도입해 정확한 정보를 바탕으로 생산 계획을 짜고 재고 수준을 낮췄다. 유통 고객에게 제품을 공급하는 시간도 최소한으로 줄였다.

삼성전자 모니터가 글로벌 1위로 올라서고 승승장구하고 있을 무렵 북미 총괄 판매법인과 멕시코 생산법인은 TV 수요 예측과 생산 및 납기 준수를 놓고 다툼이 끊이질 않았다.

김석기 삼성전자 멕시코 생산법인장 상무는 “판매법인의 주문을 생산법인이 맞추지 못할 때가 많았고 판매법인의 과도한 수요 예측과 계획으로 재고가 쌓이면 생산법인은 왜 팔지 못하느냐고 항의하는 식이었다”고 말했다.

2002년 당시 베스트바이가 평가한 삼성전자의 물류 평가지표는 30%에 그쳤다. 10개를 주기로 약속했지만 실제 공급된 물량은 3개였다는 말이다. 소니의 경우 물류 평가지표가 70% 이상이었다. 공급 약속이 지켜지지 못하니 베스트바이 입장에서도 삼성전자 TV를 전면에 내세우질 못했다.

최 부회장은 TV 사업에도 혁신 SCM 프로세스를 적용해나갔다. 삼성전자에서 SCM그룹장을 지낸 박성칠 현 대상 대표는 저서 ‘서플라이 체인 프로세스 혁신’에서 삼성전자의 SCM 혁신 활동을 우회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이 책에 따르면 수요, 구매, 생산, 배송, 재무, 신제품 개발 계획 등을 하나로 통합하고 모든 프로세스가 하나의 계획에 동의하도록 한 뒤 계획대로 실행하고 추후 이를 평가하면서 문제점을 고쳐나가는 PDCA(Plan, Do, Check, Act)가 삼성전자 SCM 프로세스의 핵심이다.

2002년부터 7년간 삼성전자 미국법인 물류센터장을 지낸 고창범 현 인하대 물류 전문대학원 교수도 최근 출간한 저서 ‘강한 기업의 조건 SCM(공급망관리)’을 통해 삼성전자가 미국 TV 시장을 석권할 수 있었던 이유와 성과를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SCM 프로세스 개선과 함께 베스트바이 등에서 실제 판매 정보를 입수(CFPR Collaborative Planning Forecasting Replenishment)하고 이 같은 정확한 실 판매 정보를 기반으로 공급 시간 단축이라는 목표를 갖고 업무를 시작했다.

그저 베스트바이 등 유통 고객의 창고에 제품을 쌓는 것이 아니라 재고가 과다하면 프로모션을 기획해 이를 재빨리 해소시키고 부족하면 즉시 물량을 보충해주는 공급사 재고관리(VMI Vendor Managed Inventory) 기법도 도입했다.

삼성전자는 이 과정에서 멕시코 생산법인과 한 시간 거리인 미국 샌디에이고에 물류법인을 신설, 물류 부문도 강화했다.

그 결과 2002년 30%였던 베스트바이 물류 평가지표는 2006년 85% 이상으로 올라왔다. 이 같은 지표는 베스트바이에 제품을 공급하는 전 세계 전자업체 가운데 1위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소니 TV의 자리를 삼성전자 TV가 꿰 차고 앉은 순간이 바로 이 때부터였다.

유통 재고를 포함한 전 SCM 구간의 재고(자재 재고, 반제품 재고 등)도 2002년 11주에서 6주 이내로 줄어들었다. 물류 비용은 3.5%에서 2% 이내로 낮아졌으며 전체 매출액은 3배 이상 증가하며 글로벌 TV 1위 자리에 올라섰다. 그야말로 눈부신 발전이다.

최지성 부회장은 “일본 업체들이 삼성에 대해 부러운 것 중 하나가 SCM이라고 얘기한다”며 “전자제품 가격은 1년에 40~50%씩 떨어지는 게 다반사인데 SCM을 통해 재고를 효과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것은 제조 기업의 핵심적인 경쟁력”이라고 말했다.

고창범 교수는“일본 업체들이 삼성전자를 벤치마킹한 후 경쟁력의 핵심은 스피드 경영이라 결론내린 바 있는데 이는 2000년부터 SCM 체계를 도입, 시스템과 프로세스의 일체화를 지속 추진한 성과를 높이 평가한 것”이라고 말했다.

박성칠 대표는 여러 업체들이 삼성전자의 혁신 사례와 스피드 경영을 배우려 하고 있지만 이는 쉽지 않은 일이라고 설명했다.

박 대표는 “전체의 일부분은 복사할 수 있지만 전체가 엮어지는 경영시스템은 쉽게 복사되지 않는다"며 "최고경영자가 매우 상세한 내용까지 알아야 SCM이나 프로세스 경쟁력을 향상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삼성전자는 지난 2006년 이후부터 미국은 물론 글로벌 TV 시장에서 줄곧 1위 자리를 놓치지 않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NPD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올 상반기에도 북미 디지털TV 시장에서 매출 기준 35%, 수량 기준 25.3%의 점유율로 1위 자리를 지켰다. 이는 매출 2위인 소니(11.9%)와 수량 2위인 LG전자(9.1%)를 상당한 수준으로 따돌린 것이다.

업계에선 앞선 제품력과 SCM 경쟁력을 가진 삼성전자가 당분간 전 세계 TV 1위 자리를 고수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그러나 앞으로는 고도화 된 SCM 경쟁력 향상에 전사 역량을 집중하기 보단 창의적 제품 개발을 통해 수익성을 높이고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는 데 매진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SCM을 음악으로 생각하면 삼성전자는 잘 짜여진 오케스트라, 애플은 재즈에 비유된다”며 “전통 제조업의 SCM 기준으로 보면 애플은 생산과 물류 부문에서 삼성전자 대비 현저하게 떨어지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일부 재즈 음악은 뜯어서 들으면 어딘가 비어있는 것 같으나 하나로 합쳐지면 아름다운 선율이 되고 애플도 SCM 관점에선 어딘가 모자라나 혁신 제품으로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고 굉장한 수익을 올리고 있다”며 “삼성전자도 프로세스 관점에서 SCM보단 제품 혁신에 무게를 두는 전략을 고려하는 것이 고성장의 지름길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한주엽 기자>powerusr@d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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