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정치는 4류, 관료와 행정은 3류, 기업은 2류다.”
지난 1995년,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베이징 발언은 당시 국내 정치권와 재계에 적지않은 파장을 일으켰다. 그 때문인지 지금까지 이회장의 입은 꼭 필요할 때 외에는 굳게 닫혀 있었다.
13년이나 흐른 지금, 이회장의 당시 발언을 현실에 그대로 대입해보자. 과연 어색한가?
공과(功過)를 뒤로 하고,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인물이 역사의 무대에서 쓸쓸하게 퇴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착찹하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결국 22일, 삼성과 관련된 일체의 자리에서 물러나겠다고 전격 선언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파격이다.
선대 회장(故 이병철 회장)의 유지를 이어받아 지난 20여년동안 삼성을 초일류기업으로 키운 이회장은 결국 축복받지 못한 퇴장을 택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이다.
'모든 허물을 가지고 가겠다'며 떠나는 그에게 ‘그동안 고생 많으셨다’는 인사를 먼저 해야 할 것 같다.
물론 이번 쇄신안에서 계열사간 순환출자 방식을 통한 지배구조의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한 내용 등 그동안 삼성의 약점으로 지목받았던 몇가지 사안이 명쾌하게 제시되지 못한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그동안 삼성은 단순한 기업 브랜드를 뛰어넘어 한국을 대표하는 글로벌 기업이라는 자긍심을 심어줬다.
그러나 이번 특검 기간 동안 일반 국민들이 초일류기업 삼성의 ‘또 다른 모습’에 충격을 받았고 허탈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물론 “삼성의 허물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가뜩이나 경제가 어려운데 삼성을 너무 몰아세우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우리 국민들 중에 삼성이 망하기를 바라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이번 특검 수사에서 제기되 의혹들에 대해 “이쯤에서 덮자”는 사람도, “다 털고 환골탈태함으로써 진정한 글로벌 베스트 기업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주장도 결국 삼성을 아끼는 심사에서 출발했음을 잘 안다.
어쩌면 삼성의 진정한 위기는 지금부터 일지 모른다. 무엇보다 삼성에는 지금 ‘강력한 힘’의 공백이 생겼기 때문이다.
삼성이 상황을 잘 극복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따라 기업의 운명은 극단으로 치달을 수 있다. 좀 더 확대하면 우리 경제와도 직결된 현실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무엇보다 삼성에게 '권력으로부터의 해방'을 주문하고 싶다. 물론 기업이 권력에 기대고 싶어 하는 유혹을 떨쳐내는 것도 우리 시대에서 해결해야 할 숙제이다.
지난 십수년동안, 국민들은 정치적 변동이 생길때마다 검찰청 포토라인을 밟는 재계 총수들의 모습을 너무나 자주 보아왔다. 실로 반갑지 않은 관행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경제살리기의 최우선 가치로 선언했다. 기업이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고 정상적인 경영활동에만 매진하도록 보장해주는 것, 어쩌면 이것이 진정한 ‘비즈니스 프렌들리’일 것이다.
삼성이 이번 기회를 통해 과거의 허물을 벗고 진정한 의미의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 거듭나기를 기대해 본다.
<박기록 기자>rock@d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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