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한국에서는 팔로알토네트웍스와 같은 글로벌 보안기업이 없을까? 대기업은커녕 기업가치 1조원을 넘는 사이버보안 유니콘기업조차 전무한 실정이다. 전세계적으로 기술 발전과 함께 보안산업은 성장하고 있지만, 아직 한국에선 제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규모의 경제를 이루지 못하고 만년 유망주에 머무르는 국내 보안산업, 더 이상 이대로는 안 된다. <디지털데일리>는 특별기획을 통해 국내 보안산업 현주소를 진단한다. <편집자주>
[디지털데일리 김보민기자] '2120억달러(약 309조원)'. 시장조사업체 가트너는 올해 전 세계 정보보안 지출이 300조원 선을 넘어설 것으로 예측했다. 사이버 공격 난도가 높아지면서 산업군을 망라하고 전방위적인 보안 투자가 이어질 수 있다는 전망이다.
글로벌 보안 기업들은 늘어난 수요를 잡기 위해 각개전투를 벌이고 있지만 국내 업계는 상반된 분위기다. 공공과 내수 시장이 주요 매출원인 만큼, 글로벌 전망치 만으로 호재를 바라기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민간 매출 비중이 크더라도 고객사 경영진 의지 없이 실적을 확보하기 쉽지 않아, 올해도 영세 산업 딱지를 떼어내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 국내에서만 잘 벌면 뭐하나…"적은 수요에 경쟁만 치열"
국내 보안 기업들이 공공 시장을 필두로 명맥을 이어왔다는 점은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한국정보보호산업협회(KISIA)가 공개한 '2024년 국내 정보보호산업 실태조사'에 따르면, 국산 정보보안 솔루션 매출 중 37.6%는 공공기관에서 나왔다. 정보보안 서비스 또한 공공 매출이 39.8%를 차지했다. 얼마나 많은, 혹은 얼마나 규모가 큰 공공사업을 수주하느냐에 따라 국내 보안 기업들의 명운이 달라질 수 있다는 의미다.
내수 시장에 대한 의존도 높은 실정이다. 국내 보안 기업들이 가장 최근 공시한 보고서를 기준으로 매출 실적을 살펴보면, 대다수가 90% 안팎으로 내수 사업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대표적으로 라온시큐어 99%(2024년 3분기), 안랩 96%(2024년 3분기), 지니언스 97%(2024년) , 윈스 93%(2024년), 아톤 88%(2024년)다. 케이사인 경우 지난해 기준 전체 매출에서 내수 비중이 100%를 차지했다. 국내 보안 기업들이 차세대 먹거리로 해외 사업을 꼽고 미국, 중동, 일본, 동남아 지역을 공략하고 있지만 여전히 국내 사업에서 실적을 내고 있다는 점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문제는 국내 시장 규모가 글로벌 대비 크지 않은 데다, 공공 또한 보안 투자를 옥죄고 있어 성장 요인이 불분명하다는 사실이다. 올해의 경우, 정국 혼란으로 신규 공공사업이 더딘 속도로 발주되면서 어려움을 호소하는 기업이 늘고 있다. 연구·개발(R&D) 전담기관에서는 보안 기업을 대상으로 투자를 줄이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업계에서는 국내 보안 시장의 구조가 성장을 저해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국내 문서보안 기업 관계자는 "(주요국과 비교했을 때) 한국 보안 시장은 구매자가 힘을 가지고 있는 구조"라며 "내수에 초점이 맞춰진 만큼 시장은 좁고 구매 수요는 적은데, 그에 비해 플레이어(공급기업)는 너무 많다"고 말했다.
매물로 나오는 공공사업은 물론 대형 매출을 낼 만한 대기업 고객도 제한적인데, 보안 기업 수만 늘어나는 실정이라는 취지다. 이 관계자는 "국내 시장은 몇 안 되는 대기업을 중심으로 보안에 투자를 하는 경향이 있는데, 저가 경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라며 "국내 보안 시장이 글로벌 수준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공급기업이 줄거나 구매자가 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단기간에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운 만큼, 올해 업황이 좋지 않을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디지털데일리>가 국내 업계를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 <지난 기사 참조 [韓보안진단]① '돈줄'이 흘러야, 한국 보안산업이 산다>에 따르면, 보안 기업 응답자 48%는 올해 보안 업황을 '부정적'으로 본다고 답했다.
한 응답자는 "올해 국정 운영 상태를 봤을 때 공공사업 규모가 축소되지 않을까 걱정이 있다"며 "시장 수요는 줄어드는데 공급 기업은 변동이 없으니, 결국 경쟁만 더 치열해질 것으로 예상한다"고 답했다. 다른 응답자는 "탄핵, 대선 등 국내 정세가 불확실해 전 산업 분야에 대한 투자가 축소되거나 연기될 것으로 예상한다"고 이유를 밝혔다.
◆ M&A 동력 없고 경영진 의지 미미…정책 효과도 '아직'
국내 보안 산업을 성장시킬 만한 동력이 없다는 점도 문제점으로 꼽힌다. 글로벌 기업의 경우 기술 개발과 채널 확대를 넘어, 인수·합병(M&A) 전략으로 대규모 투자를 이어가고 있지만 국내에서는 각자도생을 택하고 있다. 대신 파트너십과 동맹(얼라이언스) 체계를 유지하고 있어, 자본과 인재를 유입하려는 움직임은 미비한 수준이다.
최근 구글은 보안 스타트업 위즈를 46조원에 인수한다고 밝혔다. 창립 이래 최대 규모로, 구글이 클라우드 보안 시장에서 점유율을 높일 가능성이 커졌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글로벌 시장에서는 조·억단위 인수가 매해 발생하고 있다. 시스코-스플렁크, 아카마이테크놀로지스-에지오, 포티넷-레이스워크가 대표적인 사례다.
국내에서는 SK쉴더스가 지난해 12월 보안관제 기업 시큐레이어를 수백억원대에 인수한다고 밝힌 바 있다. 국내 업계 관심사가 쏠린 M&A지만, 글로벌 M&A 규모와 비교하면 미미한 수준이다.
보안 산업에 대한 수요자들의 관심이 저조하다는 점도 넘어야 할 산으로 거론된다. 공공이 아닌 금융·일반 기업을 대상으로 보안 제품 및 서비스를 판매하더라도, 최종 결재 단계에서 경영진 의지가 없다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디지털데일리> 설문조사에 따르면, 최고정보보호책임자(CISO) 및 기업 보안담당 응답자 중 53%는 '국내 보안 산업 발전을 위해 개선돼야 하는 요소'를 묻는 질문에 '경영진 인식'이 중요하다고 답했다. '보안 투자를 늘리기 위해 어떤 동력이 필요하냐'는 질문에는 '주요 임원의 보안 우위 확보 의지(60%)가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정부 주도로 신(新)보안 체계에 대한 논의가 시작됐지만, 실제 사업 효과를 체감하는 곳도 많지 않다. 현재 정부와 산하 기관은 제로트러스트, 국가망보안체계(N²SF) 등 차세대 보안 체계를 강조하며 정책과 실증·지원사업을 추진하고 있지만, 실제 시장 확대를 체감할 만한 성과는 나오지 않았다.
신 보안체계를 확대하기 위해서도 경영진 의지가 필요한 시점이라는 의견이 나오는 이유다. 이달 한국인터넷진흥원(KISA)이 모집 공고한 '소프트웨어자재명세서(SBOM) 기반 공급망 보안 모델 구축 지원사업'에서도 같은 우려사항이 나오고 있다. 한국인터넷진흥원(KISA)은 지난 13일 사업설명회를 열고 "가장 중요한 것은 높으신 분(경영진)들의 추진력"이라며 "요청이 있을 시 C레벨 및 실무급을 대상으로 공급망 보안이 왜 중요한지 별도로 소개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일각에서는 개인정보 유출과 같이 대규모 보안 사고가 발생해야 경영진 인식이 제고될 수 있다고 본다. 다만 이러한 추세만으로 국내 보안 시장을 끌어올리는 데 한계가 있어 보안 사고 예방, 인력 확보 등 영역에 강제성을 부여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된다.
<디지털데일리> 설문에 응답한 정보보호 담당자는 "강제성 없는 전담 인력 확보 권고로 기관장 및 임원직의 저조한 인식이 이어지고 있고, 충원이 어려운 실정"이라며 "전담인력 확보를 강제한다면 보안 산업에 뛰어드는 신규 인재가 많을 것이고, 안정된 환경에서 업무를 진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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