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몇 년 사이 이뤄진 인공지능(AI) 기술의 급격한 발전은 전 세계 산업군 전반의 풍경을 바꾸고 있다. 예부터 AI 기술을 들여다봤던 게임업계도 앞다퉈 AI 기술 연구 및 관련 사업을 확장하며 레벨 업(Level Up)을 노리는 모습이다. AI를 이용해 업무 효율화를 꾀하는 것에서 나아가, 궁극적으로는 인간처럼 생각하는 NPC(논플레이어블캐릭터) 개발 등 혁신을 꿈꾸고 있다. 게임업계의 AI 동행기를 디지털데일리가 소개한다. <편집자주>
[디지털데일리 문대찬기자] 지난 2021년 출범한 크래프톤의 인공지능(AI) 조직은 정예(精銳)라는 수식이 어울리는 곳이다. 현재 딥러닝실과 AI 전략팀에 소속된 인력은 약 60여명으로, 규모로는 수백여명의 관련 인력을 운용하는 경쟁사 엔씨소프트와 넥슨 등에 한참 못 미친다.
그러나 AI 기술 우수성이나 관련 이해도는 이들 못지않다. AI 학술대회 뉴립스 메인 트랙에 논문을 게재한 것이 그 방증이다. 뉴립스는 AI와 머신러닝 분야에서 세계 최고 권위를 가진 학회로, 메인 트랙의 경우 논문 채택률이 약 26%에 불과할 정도로 심사 기준이 까다롭다.
크래프톤이 뉴립스에 발표한 논문은 총 5개로, 국내외 게임사를 통틀어 텐센트와 소니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수치다. 크래프톤은 이외에도 전산언어학회, 학습이론학회(COLT) 등 AI 국제 학회에 총 14편 논문을 게재하는 등 기술 역량을 인정받았다.
크래프톤은 올해를 AI 기술 영향력 확대의 원년으로 삼고 있다. 김창한 대표가 직접 나서 올해 주요 경영 전략 중 하나로 꼽았을 정도다. AI 딥러닝 기술을 게임 산업 판도를 바꿀 ‘게임체인저’라 보고 개발 단계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하겠단 심산이다.
크래프톤은 AI 기술 활용을 가속화 하기 위해 이달 초 AI 전략팀을 신설하기도 했다. 딥러닝 본부와 개발 스튜디오간 가교 역할을 수행하면서, 자체 기술의 사업화를 도모하는 조직이다.
지난 14일 서울 강남구 크래프톤 오피스에서 만난 AI 전략팀 김도균 매니저는 “전사적으로 AI 기술을 활용하는 것을 가속화하고 기대 효과를 창출하기 위해 신설된 팀”이라면서 “AI 기술을 확보하고, 스튜디오 상황에 맞는 적합한 AI 기술을 제안하고 지원할 예정이다. 법적 문제나 윤리적 문제를 돌보고 AI 기술을 사업화하는 부분도 살펴보려 한다”고 설명했다.
크래프톤이 AI 활용을 통해 기대하는 바 중 하나는 업무 효율화다. 기획이나 개발 과정에 있는 게임을 경영진 혹은 투자자들에게 보여주는 단계(버티컬슬라이스)에 이르기까지 소비되는 시간과 노동력 등을 대폭 줄여 포트폴리오 다각화를 노리는 것이다.
딥러닝 본부 성준식 실장은 “AAA급 게임에 들어가는 개발 비용은 천문학적 수준이다. 일례로 A급 성우진으로 캐릭터 더빙을 한다고 하면, 시간당 녹음 비용을 100만원으로만 잡아도 많은 시간과 돈이 들어간다. 어떤 3D 모델을 만든다고 하더라도 콘셉트를 잡고 디테일을 채우는 작업을 하다보면 3주가량이 소요된다”면서 “AI를 활용하면 제작 비용도 줄이고 3주에 한 개 만들던 걸 세 개 만들 수 있다. 이용자에 제공할 수 있는 콘텐츠가 보다 다양해지는 셈”이라고 설명했다.
실제, 크래프톤은 지난해 3월부터 전 직원에게 챗GPT 등 딥러닝 솔루션 이용료 일체를 지원하며 딥러닝 본부에서 제작한 AI 툴과 매뉴얼을 배포해 AI 활용도를 높이고 있다. 현재 전 직원의 90% 이상이 업무에 AI를 활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크래프톤은 업무 효율화에서 나아가, AI를 통한 게임 제작 혁신도 꾀하고 있다. AI에 특정 정보나 설정 등을 학습시킨 다음, 깊이 있는 게임 세계관을 구축하게 만드는 식이다.
성 실장에 따르면 딥러닝실은 2025년 이후 출시가 예정된 신작 ‘눈물을마시는새’ 개발에 이러한 AI를 활용하는 방안을 연구 중이다. 해당 게임 원작은 동명의 판타지 소설이다.
성 실장은 “게임을 준비할 때 예측할 수 있는 건 출시 시점까지 많은 개발자가 고용이 되고 해고가 되는 등 숱한 변경이 있을 것이라는 점”이라면서 “특정 스테이지를 설계하거나 NPC가 뱉는 대사를 적합하게 설정하려면 이들이 전부 원작을 읽고 오길 기대할 텐데, 모든 이들이 내용을 온전히 기억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러한 문제를 언어모델로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고민 중이다. 몇 가지 실험을 거친 결과 유의미한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면서 “예컨대 ‘티나한’은 ‘나가’ 종족에게 아내가 살해당했기에 엄청난 적의를 갖고 있다. 또 티나한은 ‘레콘’ 종족이지만 동족들과 달리 공동체 의식을 갖고 있다. 해당 설정을 반영해 대화를 생성해봤더니 몇몇 부분에서 가능성을 엿봤다”고 설명했다.
성 실장은 “이런 것들을 조금 더 깊이 있게 확장하고 지속한다고 하면, 향후에는 정말 똑똑한 언어 모델과 함께 게임 개발을 함께할 수 있는 형태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부연했다.
크래프톤은 직접 대형 언어모델을 개발하기 보다, 시중의 경쟁력 있는 모델을 사용해 개발 효율화를 더하고 최적화나 저작권 등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 부분들에 대해선 개별적으로 ‘크래프Talk(톡)’ 등 자체 AI 도구를 만들어 제공하는 방향에 집중하고 있다.
성 실장은 “이미 시중엔 좋은 언어모델이 많다. 그걸 게임성에 잘 활용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서 “아트 리소스를 제공하는 유명 모델인 ‘미드저니’나 ‘스테이블디퓨전’ 등은 저작권 문제로 대규모 소송 중이다. 스피치 문제도 성우 저작권이 걸려 있다. 이런 부분은 내부에서 보유한 스피치 모델인 크래프톡 등으로 대체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올 하반기 출시 예정인 PC 시뮬레이션 게임 신작 ‘인조이’ 개발팀과 협업이 좋은 예다. 딥러닝 본부는 현재 인조이 내에서 이용자가 원하는 이미지대로 캐릭터 의상이나 가구를 생성하는 도구를 지원하고, 24시간 시뮬레이션 되는 NPC 구현을 돕고 있다.
성 실장은 “인조이엔 실제 존재하는 임의의 것(외형이나 옷가지)을 이용자가 넣을 수 있는데, 저작권이 자유로운 모델이 필요하다 보니 인하우스로 AI 도구를 개발하고 있다. 이러한 자체 도구는 통제된 환경에서 저작권 이슈를 조절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고 전했다.
이어 “24시간 상호작용하는 NPC는 컴퓨팅 파워가 많이 들어간다. 대규모 언어모델은 리소스 자원이 많이 들어가기 때문에 렌더링까지 돌리면 게임이 멈춰버릴 수도 있다”며 “언어모델 성능을 최대한 유지하면서 게임 퍼포먼스는 떨어뜨리지 않는 도구를 연구 개발 중이다”라고 귀띔했다.
크래프톤은 이렇게 자체 개발한 소형 모델을 향후 외부로 확장해 사업화 할 계획도 갖고 있다. 김 매니저는 “시장 상황은 어떤지, 우리 기술력은 어떤지 우선 판단이 돼야 한다”며 말을 아끼면서도 “사업화를 검토하기 위해 전략팀이 생긴 것”이라며 가능성을 열어뒀다.
한편, 크래프톤은 AI 기술을 통해 새로운 게임 즐거움을 제공하는 것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김 매니저는 “우리는 흔히 ‘엔들리스(endless)’ 게임 플레이라고 한다. 내게 계속 맞춰지고 나만 경험할 수 있는 게임을 몇 번이고 플레이하게 되는 거다. 희귀하고 영원한 게임 플레이를 즐길 수 있게 하는 것이 우리가 AI 활용으로 추구하는 방향 중 하나”라고 말했다.
기초적인 형태이지만 벌써 AI 기술이 적용된 게임들도 여럿 있다. 딥러닝 전문 독립 스튜디오 렐루게임즈가 GPT를 기반해 만든 추리 게임 ‘언커버더스모킹건’이 일례다.
성 실장은 “GPT와 같은 언어 모델들이 여전히 옳고 그른지에 대한 판단을 하지 못하는 환각이라는 현상을 겪고 있다. 언커버더스모킹건은 그 환각을 되게 위트있게 잘 녹여낸 게임이다. 현재 기술의 한계를 되게 영리하게 풀어내고자 한 시도”라고 설명했다.
크래프톤은 올 상반기 모바일 게임 ‘디펜스더비’에 강화학습 능력을 지닌 AI를 이용해 게임 재미를 높일 계획도 갖고 있다. 성 실장은 “디펜스더비 팀 같은 경우는 사용자와 대결하는 AI 봇(bot)을 만든 상태였지만, 성능이 특정 등급 이상 올라가지 않는 고민이 있었다. 이를 나름의 신기술 도입으로 해결할 수 있느냐는 문의가 있었고, 강화학습 AI를 적용하게 됐다”고 전했다.
크래프톤의 이러한 지향점의 종착지는 이용자와 유사한 수준으로 게임을 플레이하는 ‘버추얼프렌드’다. 말 그대로 AI를 벗삼아 게임을 즐기는 날을 꿈꾸는 것이다.
성 실장은 “지향하고자 하는 바 중 하나는 예를 들어 이렇다. AI가 함께 게임 플레이를 몇 번 한 뒤 내 플레이 성향을 알게 되면, 이후엔 내 움직임만 보고 유사한 플레이를 펼치는 것이다. 내가 저격 플레이를 한다고 하면 AI가 상대 위치를 체크해주는 식이다. 그렇다고 맵핵처럼 되면 말이 되지 않으니 적당한 수준에서 이용자와 상호작용하는 것들을 기대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그는 버추얼 프렌드의 최종 형태에 대해선 지속적으로 고민 중이라고 털어놨다. 버추얼 프렌드라고 하면 대개 인간처럼 대화할 수 있는 AI를 떠올리지만, 일부 게임에서는 대화하는 것보다 명령어 등을 눌러 플레이를 수행하는 게 보다 효율적이라는 설명이다.
성 실장은 “현재 AI에게 말을 걸면 이를 대화로 도출해내기까지 적잖은 시간이 소요된다. 좋은 언어모델이나 음성 도구로 시간을 단축시킬 수는 있겠지만 실질적으로 금전적 문제를 동반한다. 대화하는 AI가 게임 재미를 극대화시킬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단축키를 눌러 명령하거나 플레이 패턴을 보고 AI가 학습하도록 하는 편이 오히려 나을 수 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도 성 실장은 “물론 버추얼 프렌드 연구가 기본적으로는 이용자와 소통하는 것에 방점이 찍혀 있는 것은 맞다. 앞선 디펜스더비 사례처럼 스피치하는 AI를 어떻게 게임에 활용하면 재미있느냐에 대한 고민 등을 게임 스튜디오와 계속 해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성 실장은 끝으로 AI의 일상 확장에 게임업계가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인조이나 ‘GTA’ 시리즈처럼 게임 산업은 정말로 많은 시뮬레이션 세상을 만들 수 있다. 이 세상에 AI 기술을 적용했을 때 많은 장단점을 미리 볼 수 있는 거다. 그 중 장점만을 현실 세계로 옮겨오는 식으로 게임산업이 기여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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