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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T 40년] ⑧ 故 최종현 “제2 창업한다는 마음으로”…마침내 'SK텔레콤'

[MWC24]

전세계 내노라 하는 이동통신사들이 총출동하는 스페인 바르셀로나 모바일월드콩글레스(MWC)에서 올해도 SK텔레콤은 메인홀 중심에서 우리나라 정보통신기술(ICT)을 글로벌에 전파하고 있습니다. 올해로 40주년을 맞이한 SK텔레콤은 국내 1위 이통사를 넘어, AI 컴퍼니로 또 다른 패러다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과거 40년을 조망해보고 미래 ICT 개척자로서 SK텔레콤의 비전을 살펴봅니다. <편집자주>

최종현 SK그룹 선대회장(중) [사진=SK그룹]
최종현 SK그룹 선대회장(중) [사진=SK그룹]

[디지털데일리 김문기기자] “제2의 창업을 한다는 마음가짐으로 경영에 임하고, 앞으로 SK텔레콤이 세계 각지에서 친근하고 강한 이름으로 기억될 수 있도록 구성원 모두 실력을 쌓아 경영활동에 임해주길 바란다.”

1997년 3월 24일 잠실 올림픽 공원 내 역도경기장에서 新 CI 선포식을 갖은 자리에서 최종현 선경그룹 회장은 한국이동통신의 SK텔레콤 사명 변경을 발표했다. SK텔레콤뿐만 아니라 선경이 SK로 바뀌었던 때다. 이 자리에는 임직원 2천800여 임직원이 함께 했다.

손길승 SK 부회장도 이 자리에서 "이미 오래전에 글로벌리제이션 시대 도래를 예견한 우리 그룹은 세계 일류기업들과의 경쟁에서 그들의 수준을 능가하기 위해 SKMS/SUPEX라는 경영기본이념과 행동양식을 창안하여 꾸준히 21세기를 준비해 왔다. 새로 태어나는 이름이 SK를 근간으로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 비롯됐다. SK텔레콤은 한국을 대표하는 종합정보통신기업으로 발돋움할 것이며, 우리 그룹이 추진하는 '에너지와 정보통신'의 중심축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하루를 위해 SK텔레콤 실무 TF와 홍보실 사무국 직원들은 장장 10개월이라는 시간을 투자했다. 당시 사보인 ‘SK월드’에 나선 이원재 전무에 따르면 선포식 행사 준비만 2개월, 12시 이전 퇴근하는 날이 없었다고 한다. 게다가 역도경기장 공사로 인한 복구, 국민체육진흥공단에서 환경보호 차원에서 일회용 도시락 반입을 금지하자 재활용 가능한 도시락을 3일 동안 준비하는 등의 부가적인 노력이 더해졌다.

SK텔레콤은 사명 변경에 따라 세계 20위 종합정보통신사업자를 목표로 했다. 온라인 사업과 케이블TV, 콘텐츠 등으로 사업을 다각화하고 수출을 통한 글로벌 기업 성장을 도모했다. 고객만족경영 10대 과제를 수립하고 고객 확보에도 만전을 기했다.

이후 1998년 1월 5일까지 SK그룹은 모든 관계사의 CI를 바꿨다. 45년간 정들었던 ‘선경'이라는 이름을 뒤로하고 ‘SK’로 새 출발을 알렸다. 나비처럼 비상하는 새로운 제2의 시작점을 마련한 최종현 SK그룹 회장도 먼 길로 떠나갔다. 오직 국가경제발전만을 생각했던 최 회장은 수많은 공적을 쌓아올렸다. 특히, 항상 현재보다는 미래를 내다봤던 최 회장의 유산처럼 SK텔레콤도 대한민국의 정보통신 발전의 중요한 중심축 역할을 하며 나날이 성장해갔다.


칼바람에도 사업확장 '정면돌파'

1996년 6월 10일. 이동통신 분야에 새로운 도전자들이 선정됐다. 한국통신과 LG텔레콤, 한솔PCS가 PCS 사업자로 선택된 것. 그해 한국통신은 한국통신프리텔(KTF), LG텔레콤과 한솔PCS가 나란히 출범하며, 국내 이통5사 경쟁구도가 완성됐다. 한국이동통신의 ‘스피드 011’, 신세기통신 ‘파워 017’에 이어 KTF는 016, 한솔PCS는 018, LG텔레콤은 019 식별번호를 통해 그 어느때보다 치열한 경합을 벌였다.

하지만 시장은 급속도로 얼어붙었다. 1998년은 정보통신 시장개방 원년의 해로 외국 통신사업자가 국내 통신업체 지분을 33% 확보할 수 있게 됐다. 자칫하면 주도권이 해외로 나갈 수도 있었다. 게다가 IMF 사태로 인해 내수 경제와 소비 위축이라는 어려움에 봉착했다. 당연히 기존 설비투자 비용은 감축됐다. 인력도 하나둘 빠져나갔다.

거기에 정치 상황도 엄중했다. 정권이 바뀌면 늘 그렇듯 이전 정권 비판이 시작됐다. PCS 사업자 선정 역시도 그 칼날을 빗겨가기 어려웠다. 경쟁을 통한 진화발전을 목표로 한 이통5사가 졸지에 공급과잉에 따른 재원 낭비로 바뀌는 순간. 정부가 뽑고 정부가 버리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연출된 셈이다.

시장은 여러 억측을 제시하기에 이르렀다. 이통사간 인수합병이 이뤄질 것이라는 추정이었다. 과당경쟁에 따른 인수합병. 물론 그렇게된다고 하더라도 정부는 정책실패를 감내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도 SK텔레콤은 꿋꿋히 사업을 영위해갔다. 현재는 알뜰폰의 모태인 별정통신사업의 길이 열리자 SK텔레콤은 1998년 4월 9일 SK텔링크를 출범시켰다. 한국통신, 데이콤을 이어 국제전화시장에 진출했다. 미국 AT&T, 일본 KDDI 등과 전략적 제휴를 체결하고 같은 해 4월 28일 정보통신부로부터 별정통신 1호와 2호 사업 등록을 완료했다. 6월 10일에는 식별번호를 부여받았다. 이 식별번호가 ‘국제전화 00700’이다.

이동통신 사업자가 직접 단말 제조에 뛰어든 사례도 생겨났다. 이 역시도 SK텔레콤 사례로 1998년 10월 1일 출범한 SK텔레텍이 꼽힌다.

사실 SK텔레콤은 1995년 ‘MOVE21’을 선언하면서 제조업 진출을 모색했다. 이 같은 바람이 가속화된 때가 1998년초다. SK텔레콤은 기획조정실 산하 ITM(Intelligence Telecommunication Manufacturing) 전담반을 가동했다. 정보통신업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남들과는 달리 더 강력한 수직계열화 작업이 필요해서다. 생산업체 위주의 단말 공급은 실상 이동통신사업자의 요구사항이 주도적일 수 없었다.

SK텔레콤은 일본 교세라와 공동출자해 SK텔레텍을 세웠다. 출자 자본금은 378억 원으로 SK텔레콤이 72.5%, 교세라가 27.5% 비율로 참여했다. 삼성의 애니콜, LG 싸이언, 현대 걸리버와 마찬가지로 단말 브랜드가 필요했던 SK텔레텍은 브랜드명을 ‘스카이(SKY)’로 정했다. 첫 단말은 1999년 9월 출시됐다. 명칭은 ‘IM-100’으로 폴더 단말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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