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美, IRA 통해 국제정치 현실 재확인 - 반도체 협력, 한미동맹 강화 수사보다 국익 위주 접근 절실
[디지털데일리 윤상호 기자] 국제관계를 설명하는 여러 말 중에 “영원한 우방도 영원한 적도 없다”는 말이 있다. 각국은 여러 대의명분을 내세워 이합집산하지만 결국 자국의 이익을 최우선할 수 밖에 없는 사실을 일컫는 문구다.
미국이 지난 8월 제정한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은 국제정치의 현실을 명확히 드러내는 예다. 이 법의 모태인 ‘더 나은 재건법(BBB)’때부터 결과는 어느 정도 예정돼 있었다.
IRA에 우리나라가 불만을 토로하는 것은 내년부터 북미를 제외한 곳에서 생산한 전기차(EV)를 미국에 판매할 수 있는 길이 사실상 막혔기 때문이다. 다른 곳에서 만든 EV는 세제 혜택을 받지 못한다. 가격경쟁력을 잃었다. 현대자동차 LG에너지솔루션 삼성SDI SK온 등이 북미 투자를 약속하거나 진행했지만 유예를 받지 못했다. 정부와 업계가 미국에 뒤통수를 맞았다며 분개하는 이유다.
EV를 둘러싼 각국의 시장 우선주의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우리나라 배터리 3사의 생산능력(캐파) 확충 현황만 보더라도 그렇다. EV가 개화한 후 3사의 증설은 대부분 해외에서 이뤄지고 있다. 회사는 커지지만 국내 고용 창출은 제한적이다. IRA는 그나마 있는 일자리마저 위협한다.
정부가 이제 와서 다방면의 접촉을 하고 있고 미국도 우리 의견을 경청하고 있다지만 이는 외교적 수사에 불과하다. 버스는 이미 떠났다. 미국이 정책을 변경하려면 법안을 고쳐야 한다. 쉽지 않다.
국제관계의 현실이 이러하니 체념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는 ‘동아시아 반도체 공급망 네트워크’라는 숙제가 더 있다. 우리나라는 이를 반도체 전체를 지칭하는 ‘칩(Chip)4’라고 부르지만 미국은 반도체 생산에 한정하는 ‘팹(Fab)4’라고 약칭한다. 미국은 반도체 설계 기술과 장비를 주도하고 있다. 생산만 우리와 대만에 의존한다. 이 생산시설도 즉 팹도 미국 중심으로 재편을 요구하는 셈이다. 우리나라 반도체 산업의 미래는 미국의 고려 대상이 아니다.
EV 버스는 ‘한미동맹 강화’만 보다 놓쳤지만 반도체 버스도 이렇게 놓쳐서는 안된다. 일본의 반도체 산업 명멸의 역사를 되새겨야 한다. 윤석열 정부의 어깨가 무겁다. 집안 싸움에 시간을 낭비할 때가 아니다. 큰 그림을 점검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