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데일리 채수웅기자]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정부 만능주의, 정부 간섭주의를 없애겠다. 이제는 민간이 훨씬 커진만큼 정부 역할도 달라져야 한다.”
정부 정보기술(ICT) 연구개발(R&D)을 총괄하는 고위공직자의 뼈아픈 자기반성이 나왔다. 시장이, 기술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지만 정부는 변화의 흐름을 인지하지 못한 채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착각속에서 정책을 만들어왔음을 인정하고 변화를 약속했다.
30일 과학기술정보통신부(장관 유영민)가 4차 산업혁명 기술혁신 선도국가 실현을 위해 수립한 ‘I-Korea 4.0: ICT R&D 혁신전략’을 발표했다.
정부의 큰 정책 방향이 결정되거나, 업무보고가 진행되는 시기에는 부처들의 종합계획, 전략보고 등이 이어지기 마련이다. 특히, R&D 예산을 집행하는 곳은 자금을 어디에, 어떻게 사용할지 범위를 구체적으로 정하고 중장기 전략도 마련한다.
그런데 이번에 과기정통부가 발표한 ICT R&D 전략은 과거 발표, 전략과는 다른 점들이 많다.
과기정통부 정보통신산업정책관<사진>은 이번 계획을 수립하면서 고해성사를 했다. 정부 만능주의, 간섭주의 등 정부만 모르고 있었던 시장의 비판을 수용하고, 반성했다. 시장과 산업의 변화를 인정하고 정부의 역할도 바뀌어야 함을 인정했다.
이번 ICT R&D 전략과 기존 정책의 가장 큰 차이점은 정부의 역할설정이다. 예산을 집행하지만 정부가 더 이상 주인공 노릇은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특히 특정 기술, 서비스에 예산을 들이며 산업과 시장을 몇 배 성장시키겠다는 말도 안되는(?) 계획도 더 이상 추진하지 않기로 했다. 정부가 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연구자가 하고 싶은 연구를, 성공률 99%에 달하는 형식적 연구가 아니라 실패하고 경쟁하는 연구개발 환경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이번 R&D 중장기 전략을 총괄한 김광수 과기정통부 정보통신산업정책관은 “산업의 위상을 볼 때 이제 정부가 주도적으로 계획을 짜서 산업을 성장하도록 하겠다는 생각 자체를 바꿀때가 됐다”며 “정부가 못해서가 아니라 민간이 많이 성장했기 때문에 정부 역할도 달라져야 한다”고 전략 수립 배경을 설명했다.
정부가 집행하는 R&D 예산은 수년째 1조원 남짓에 불과하다. 그동안 민간의 연구개발 투자규모는 2011년 19.6조원에서 2015년 27조원 규모로 확대됐다.
김광수 국장은 “그동안 정해진 목표대로 안되면 실패라고 했다”며 “이런식으로 R&D를 해왔는데 그것이 민간의 자율성, 창의성에 부합했는지, 글로벌 시장을 리딩할 수 있는 것이었는지 반성부터 했다”고 말했다.
그동안 정부는 새로운 기술이 나올때마다 관련 시장과 산업을 육성시키는 계획을 내놓았었다. CDMA, 초고속인터넷 등 우리 ICT 산업을 끌어올리는데 정부가 큰 역할을 해온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과거의 성공에 빠져 시장과 산업의 변화흐름을 읽지 못했다. 글로벌 시장은 개방과 협력, 경쟁의 R&D 체계가 자리잡고 있었지만 우리는 여전히 정부의 목소리가 가장 컸던 것이다.
김 국장은 “민간이 개발해도 정부가 간섭해왔고, 과제도 정부가 만들어주고, 마치 공사 시방서처럼 주고 연구를 시켜왔다”며 “앞으로는 이같은 정부 간섭주의, 만능주의를 없애겠다”고 강조했다.
과기정통부가 찾아낸 해법은 개방과 공유, 자율, 경쟁 등 결국 기업들이 전면에 내세우는 가치들이었다.
김 국장은 “전 세계적으로 동일 주제로 경쟁해서 연구하는 방식들이 확산되고 있는데 우리 R&D 전략에는 없었던 것들”이라며 “앞으로는 정부가 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위험을 감수하는, 연구자가 하고 싶은, 시장 친화적 R&D를 하겠다”고 강조했다.
어느 정부나 개방과 협업을 강조했다. 하지만 ICT 관련 시설, 장비가 집중돼 있는 ETRI의 시설을 경험한 기업은 12%에 불과하다. 기업과 정부가 따로따로 연구개발하고 있다는 얘기다.
김 국장은 “글로벌 시장에서는 새로운 챌린지 형태의 방식들이 도입되고 있는데 여전히 우리는 20년전 방식으로 기술별로 나누고 과제를 기획, 공모하는 식으로 투자해왔다”며 “기술발전 속도가 빨라지며 연구와 결과물을 공유하는 산학협력 필요성도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과기정통부는 ICT 기술이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초점을 맞출 계획이다. 지난해 R&D 예산에서 국민생활 문제를 해결하는데 투자한 비중은 4.2%에 불과하다. 이를 2022년까지 45% 비중으로 확대할 방침이다.
김 국장은 "압축성장하다보니 공공부문에서 국민 문제 해결에 소홀할 수 밖에 없었다"며 "기업의 성장에 일차적인 목표를 두겠지만 교통, 환경, 국방 등에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투자를 강화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과기정통부에 따르면 지난 정부 때 만든 K-ICT 전략이 제시한 ICT 수출 목표치에 도달한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의 전략과 예측이 맞았지만 김 국장의 생각은 달랐다.
김 국장은 “반도체가 대박이 나서 지난 정부에서 제시한 목표치에 근접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산업 정책을 하면서 정부가 생산규모, 수출규모를 예측하고 제시하는 것은 버려야 하지 않을까 싶다”며 “이제는 민간이 많이 성장한 만큼, 정부의 역할도 달라져야 한다”고 재차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