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데일리 고성현 기자] 인공지능(AI) 반도체를 설계하는 국내 팹리스 업체인 리벨리온과 사피온의 합병에 속도가 붙으면서 이들이 지닌 경쟁력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양사가 보유한 기술력이 서로 시너지를 내는 구성을 만들어내고, 발빠른 시장 내 포지셔닝과 전략이 필요하다는 관측이 나온다. 아울러 각사가 최근 양산한 신경망처리장치(NPU)가 일정 수준 이상의 성과를 내야만 향후 경쟁에 유리한 위치를 잡을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20일 업계에 따르면 리벨리온과 SK텔레콤은 리벨리온-사피온코리아 간 양사 합병을 위한 본 계약을 체결했다고 18일 발표했다. 합병 후 존속법인은 사피온코리아로 하되, 리벨리온 경영진이 합병법인을 이끌게 되면서 새 회사 사명은 리벨리온으로 결정했다. 박성현 리벨리온 대표가 합병법인의 경영을 맡는다.
기존 1대2 수준으로 예상했던 사피온코리아와 리벨리온의 기업가치 비율은 1대2.4로 합의됐다. 아울러 SK텔레콤, SK하이닉스, SK스퀘어로 구성된 사피온 주주진이 보유 주식 가운데 3%(합병 후 기준)를 합병 전까지 매각할 예정이다. SK와의 내부거래로 인한 공정거래법률 적법성 여부, 조타수를 맡게 된 리벨리온과 삼성전자 파운드리와의 관계, 빠른 시장 대응 등 여러 요인을 고려한 결정으로 해석된다.
양사는 이번 합병에 따라 '골든타임'으로 지목받는 향후 2년 간의 글로벌 AI칩 경쟁에 승기를 잡을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고 보고 있다. 통상 팹리스가 칩 개발·양산 과정에서 겪기 쉬운 자금 문제를 해결하면서도, 양사 간 인적 자원을 통합해 인력 부족 문제 등을 해소할 수 있는 덕이다. 리벨리온은 아람코 등 글로벌 회사를 포함한 국내외 투자자로부터 누적 3000억원의 투자금을 유치해왔다. 아울러 내년 하반기 이후 기업공개(IPO)를 목표로 하고 있어, 관련 계획이 성공할 경우 안정적인 재원 확보가 가능해진다.
양사 간 합병이 본격화되면서 국내 팹리스가 글로벌 AI반도체 시장을 겨냥할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을지 관심이 쏠린다. 국내 팹리스 산업이 메모리 중심 생태계 구축에 따른 지원 미비, 자금 부족으로 인한 인력·투자 저조로 잔혹사를 겪어온 바 있다. 이러한 구도를 탈피해 글로벌 팹리스로 성장할 수 있느냐가 주요 선결과제인 셈이다.
합병이 마무리 될 경우 양사 연구개발(R&D) 인력은 각각 100명 수준에서 200여명 내외로 확대된다. 인력 풀이 늘어날 경우 향후 차세대 AI칩 개발에 속도를 낼 수 있는 한편, 제품 포트폴리오를 확충할 수 있게 된다.
양사가 보유한 고객사 네트워크와 권역별 주요 마케팅 포인트를 공유할 수 있는 것도 이점으로 꼽힌다. 리벨리온은 초기 금융쪽 인프라를 타깃으로 AI칩을 개발해 온 경험이 있고, 최근에는 사우디 아람코의 기업주도형 벤처캐피털(CVC)인 와이드 벤처스로부터 투자 유치를 받으며 활동 반경을 중동으로 넓혔다. 사피온은 모회사인 사피온 Inc.가 위치한 미국을 비롯해 유럽 클라우드서비스사업자(CSP) 등으로부터 관심을 받은 바 있다.
남은 과제는 주력 시장으로 보이는 초거대언어모델(LLM) 시장에서의 경쟁력 입증과 실질적인 제품 양산에 따른 성과를 만들어낼 수 있느냐다. LLM 시장의 경우 엔비디아가 시장 전체를 독점하면서 승기를 굳혀나가고 있다. 특히 AI모델에 데이터를 입력하는 학습(Training) 영역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고, 결과값을 도출하는 추론(Inference)용 칩에서도 이와 유사한 입지를 가져갈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게다가 리벨리온-사피온이 주력해 온 추론용 칩에서는 AMD를 비롯해 인텔, 세라브라스, 그록, 텐스토렌트 등 다양한 경쟁자와의 치열한 경쟁이 예고된 상황이다.
통상적으로 AI칩과 같은 첨단 공정 반도체를 개발하기 위해서는 수백억에서 천억원대의 개발 비용이 투입된다. 칩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서는 시장 규모가 작은 국내 뿐 아니라 글로벌 빅테크·데이터센터 등 우량 기업을 고객사로 확보해야만 한다. 반도체 업계 내 고객사가 칩 신뢰성 등을 이유로 한번 채택한 협력사를 바꾸지 않는 점을 고려하면, LLM 시장 진입만을 노리는 것은 위험성이 클 수 있다는 관측이다.
이에 따라 합병 이후에는 차세대 제품의 개발 방향성 등이 주로 개발 단계에서 논의될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 이뤄지는 LLM 중심 투자가 향후 소형언어모델(sLM) 등으로 분산될 수 있어 제품 다양화, 혹은 제품 단일화 등의 방침이 선제적으로 이뤄질 수 있다는 의미다.
한 업계 관계자는 "현재 AI 시장이 LLM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지만, 향후에는 칩 비용 부담 등으로 인해 협력사를 나누거나 영역별로 세분화하는 흐름을 탈 것"이라며 "빠르게 변화하는 시장의 요구를 캐치하고 타임투마켓(Time-to-market) 측면에서 강점을 보일 수 있느냐가 국내 업체들의 중점 과제가 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아울러 업계는 양산에 돌입한 각 사의 제품이 향후 성장을 위한 바로미터가 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리벨리온은 올해 1세대 AI칩인 아톰(ATOM)을 양산하고 고객사들과 개념검증(PoC)을 진행하고 있다. 그러는 한편 삼성전자 파운드리와 협력한 4나노 LLM 데이터센터용 칩 '리벨'이 올해 말 양산을 앞둔 상황이다. 사피온도 지난해 말 공개한 X330 양산에 돌입, 고객사와의 공급 논의 등을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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