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계적으로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이차전지 등 제조분야의 산업적 가치가 중요해졌고, 그에 따라 소재·부품·장비(소부장)산업에 대한 관심도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하지만 미중 패권경쟁에 따른 아시아 지역의 변화와 유럽연합(EU)의 적극적인 공세로 인해 우리나라는 제품만 생산해내는 위탁국가로 전락할 우려가 크다. 해외 정세에도 흔들림 없는 K제조업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물밑에서 구슬땀을 흘리는 소부장 강소기업 육성을 통한 경쟁력 제고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소부장 미래포럼>은 <소부장 TF>를 통해 이같은 현실을 직시하고 총체적 시각을 통해 우리나라 소부장의 과거를 살피고 현재를 점검하며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숙제를 되짚어보고자 한다. [편집자주]
[디지털데일리 이건한 기자] 전세계 열강이 차세대 첨단 기술산업 패권을 두고 경쟁 중인 가운데, 미국은 반도체와 배터리 양면에서 공격적인 육성 정책을 내놓고 있다. 이는 ‘라이벌’ 중국의 성장을 강력하게 견제하면서 글로벌 제조 기반을 미국 영내로 끌어 들이려는 전략이다.
"반도체 패권 가져오자"
미국은 반도체 산업에서 오랫동안 최상위 영향력을 행사해 온 국가다. 다만 설계 및 연구개발 측면에 강점이 집중돼 있고, 제조 기반은 주로 해외에 있어 자체 생산력은 다소 부족한 편이다.
미국은 이를 극복하고 자국 중심의 반도체 생태계를 보다 강화하기 위해 2022년 8월 ‘반도체 칩과 과학법 (The CHIPS and Science Act of 2022)’ 일명 ‘칩스법’을 제정하고 총 2800억달러(약 368조원)에 달하는 대규모 지원 예산을 편성했다.
주요 내용은 ▲미국 내 반도체 투자 기업을 위한 보조금 520억달러(약 68조원) ▲반도체 생산시설 지원금 390억달러 ▲연구개발비 110억달러 ▲교육·방위산업·미래혁신에 20억달러 투입 등이다. 또한 4년간 반도체 투자에 대한 25% 세액공제 혜택도 포함돼 있다.
생산과 연구, 투자환경 측면에서 다양한 이점이 부여되는 칩스법 표결을 앞둔 시점에 인텔과 엔비디아, AMD 등 반도체 주식은 일제히 상승하기도 했다. 시장의 기대가 그만큼 컸다는 얘기다. 미국 반도체 기업뿐 아니라 한국의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대만의 TSMC 등도 유력한 수혜기업으로 꼽혔다.
하지만 일부 잡음이 따르고 있다. 올해 3월 공개된 칩스법 상세안에 기업 입장에서 곤혼스러운 조항들이 포함돼 있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당초 알려지지 않은 ‘초과 이익 공유’ 조항은 1억5000만달러 이상의 보조금을 받은 기업이 합의된 기준 이상으로 수익을 내면 초과이익의 75%를 미국 반도체 생태계에 투자해야 한다.
또한 미국은 투자 기업이 중국에서 간접 이익을 누리지 못하도록 보조금을 받은 기업은 향후 10년간 중국에서 반도체 생산량 증가에 투자하지 못하도록 제약조건을 달았다. 구체적으로 첨단 반도체는 중국 내 생산능력을 5% 이상 확장할 수 없으며, 과거 제품은 10% 이상 확장할 수 없다. 즉, 파격지원을 제공할 테니 미국 본토에 투자하되 수익의 소화도 가급적 미국 안에서 하라는 의미다.
또한 보조금 수령 기업의 반도체 생산 원가나 민감 정보인 수율, 가동률 등을 보조금 신청 단계에 제출하도록 한 것도 논란이 되고 있다. 보조금을 대가로 회사의 예민한 비밀들을 드러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대규모 투자를 위한 미국의 자금과 정책 지원은 달콤하지만, 요구조건을 모두 충족하기엔 어려운 부분이 따르는 만큼 추가적인 조율이나 대안 마련이 필요하단 지적이 따른다.
'메이드 인 아메리카' 배터리 확장
IRA는 2022년 8월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총 7730억달러(약 1007조원)의 정부 예산을 기후 변화 대응과 기업 과세 개편, 보건복지 분야 개편에 투입한다는 내용에 서명함으로써 발효된 또 하나의 대규모 정부지원 정책이다. 이름과 달리 주로 친환경 전기차 및 배터리 생태계 지원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규모도 칩스법보다 서너배 크다. 친환경 산업 지원에만 4430억달러가 쓰인다.
핵심은 북미에서 생산된 전기차 1대당 주어지는 최대 7500달러의 구매자 세액공제다. 북미에서 조립된 전기차라면 기본 3500달러, 여기에 배터리 제조 조건을 모두 충족하면 3500달러가 추가로 주어지는 구조다.
배터리는 ‘부품’과 ‘핵심광물’ 활용 조건이 있다. 양·음극판, 배터리 셀 등 부품은 ▲2023년 기준 전체 배터리 부품 가치의 50% 이상을 북미에서 생산·조립 ▲양·음극활물질, 동박 등 핵심광물은 2023년 기준 미국, 혹은 미국과 FTA(자유무역협정)를 맺은 국가, FTA와 준하는 별도의 광물협정을 맺은 국가에서 추출 및 제련한 광물 소재의 비중이 사용된 전체 핵심광물의 40% 이상을 달성할 것 등이다.
이들 비중은 매년 조정돼 부품은 최대 100%, 핵심광물은 90%까지 오른다. 미국에서 전기차 사업을 하려면 중장기적으로 미국 혹은 미국의 우방국에 생산시설을 갖춰야 한다는 얘기다. 또한 아직 최종 확정되지 않았으나 칩스법과 마찬가지로 중국에서 생산된 소재나 부품 사용 시 지원금 지급 대상에서 제외될 가능성이 높다.
특히 배터리 제조사들은 ‘첨단제조 생산세액공제(AMPC)’ 혜택이 주어진다. 미국에서 생산한 배터리 셀 1kWh당 35달러, 모듈은 kWh당 45달러의 지원금을 주는 정책이다. LG에너지솔루션, SK온 기준 IRA 초기인 올해만 해도 연간 1조원에 가까운 영업이익이 AMPC로 달성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IRA는 칩스법과 달리 잡음이 크지 않은 상황이다. 전기차 구매자, 배터리 생산자에게 모두 현금 혜택이 주어지는 셈이며 이를 통해 완성차 제조사도 판매 증가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미국 내에서 해외기업에 과도한 혜택을 주는 것 아니냔 지적이 나올 정도다.
다만 전기차와 배터리는 미국이 주도권을 쥔 반도체와 달리 상대적으로 열세에 가까운 분야다. 중국이 자국 내수시장을 중심으로 전기차 시장 점유율을 빠르게 높이고 있으며 배터리용 핵심광물의 상당수가 중국에서 가공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주요 배터리 생태계 기업들의 과제 중 하나가 ‘탈중국’으로 꼽힐만큼 중국 의존도는 상당하다.
미국 입장에선 파격적인 혜택을 제공하더라도 우선 중국의 영향력을 최대한 빠르게 제한하는 일이 우선 과제다. 덩달아 다양한 전기차, 배터리 제조공장과 관계기업들을 미국 본토로 끌어들임으로써 미국의 제조 역량 제고와 일자리 창출 등 부가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한편 IRA 외에 미국 주요 주, 정책기관 차원의 지원금 지급 규모도 상당한 수준으로 이뤄지고 있다. 오하이오주는 지난 2월 LG에너지솔루션과 혼다 합작공장에 2억3700만달러에 달하는 지원금을 제공하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지난 22일에는 미국 에너지부가 SK온과 포드의 배터리 제조 합작사인 블루오벌SK에 한화 12조원 상당의 저금리 첨단기술차량제조(ATVM) 대출을 지원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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