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계적으로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이차전지 등 제조분야의 산업적 가치가 중요해졌고, 그에 따라 소재·부품·장비(소부장)산업에 대한 관심도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하지만 미중 패권경쟁에 따른 아시아 지역의 변화와 유럽연합(EU)의 적극적인 공세로 인해 우리나라는 제품만 생산해내는 위탁국가로 전락할 우려가 크다. 해외 정세에도 흔들림 없는 K제조업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물밑에서 구슬땀을 흘리는 소부장 강소기업 육성을 통한 경쟁력 제고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소부장 미래포럼>은 <소부장 TF>를 통해 이같은 현실을 직시하고 총체적 시각을 통해 우리나라 소부장의 과거를 살피고 현재를 점검하며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숙제를 되짚어보고자 한다. <편집자주>
[디지털데일리 이건한 김도현 기자] 동·서양 최강대국으로 꼽히는 미국과 중국은 오래전부터 세계 패권을 두고 경쟁해왔다. 그중 2019년 발발된 ‘미중 무역갈등’은 수년이 지난 현재까지 양국은 물론 세계 경제와 기술 생태계 지형도 적잖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사건으로 꼽힌다. 그 중 가장 큰 전장터는 반도체다. 트럼프부터 바이든 행정부에 이르는 미국의 집요한 중국 반도체 제재는 중국에 큰 타격을 줬지만 미국이 거둔 실질적 이득은 크지 않다는 평가가 나온다.
미중 무역갈등의 시발점은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선거 유세 시절부터 “중국이 전세계 환율 및 무역질서를 교란하고 있다”며 불만을 제기했던 트럼프 전 대통령은 취임 후 2018년 7월 중국에 총 340억달러(약 43조8700억원) 규모의 수입품 보복관세 25%를 부과(818종)한다고 발표했다. 이에 반발한 중국이 미국산 농산품과 자동차, 수산물에 동일한 보복관세를 부과한 것이 양국 무역갈등의 시작이다.
이후 양측이 서로를 향한 보복관세 규모를 늘리던 중, 2019년 5월 트럼프 정부가 '회심의 카드'를 꺼냈다. 바로 중국의 최대 통신장비 및 스마트폰 제조사인 화웨이에 미국산 반도체 공급을 전격 금지하는 조치를 내린 것이다.
화웨이가 입은 타격은 막대했다. 당시부터 지금까지도 첨단 통신장비와 IT 제품에 사용되는 고성능 반도체는 대부분 인텔과 퀄컴 등 미국 업체가 세계 시장을 선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을 통한 반도체 조달 중단은 곧 중국 첨단장비 제조 생태계가 성장 동력을 크게 상실했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화웨이는 미국의 제재 이후 휴대폰 생산량이 줄고 신제품 성능 개선도 늦춰지면서 스마트폰 매출이 매년 급감하고 있다. 통신장비 시장에선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지만 전체 매출과 이익은 감소세다. 특히 '든든한 안방'이었던 자국에서조차 경쟁 휴대폰 제조사들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등 회복이 쉽지 않은 상태다.
이후 미국과 중국이 2020년 일부 화해 제스처를 취했던 상황을 지나 2023년 현재에 이르기까지 화웨이에 대한 제재는 오히려 강화되고 있다. 미국이 화웨이를 사실상 중국 제재의 상징적 본보기로 삼은 모습이다.
대체 불가 美 반도체의 '무기화'...中 고립 가속
이후에도 미국의 대중국 제재는 주로 전자산업에 집중되고 있다. 미국이 반도체를 핵심 무기로 택한 이유는 앞서 언급된 것처럼 미국이 관련 산업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기 때문이다.
반도체는 사실상 거의 모든 IT 산업의 필수 하드웨어다. 전세계의 산업화, 디지털화가 가속될수록 수요는 줄지 않고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특히 일반 소비재뿐 아니라 첨단군사장비에도 첨단 반도체가 필수이므로 미국의 반도체 수출 통제는 중국이란 나라의 시장경제는 물론 군비증강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또한 미국이 중국과 적잖은 기술 격차를 지닌 분야인 만큼, 역보복에 대한 우려도 적어 효과적인 제재 수단으로 꼽힌다.
이어 미국은 지난해 자국 내 반도체 생산을 장려하기 위한 ‘반도체 및 과학법(일명 CHIPS, 칩스법)’을 제정하고 520억달러(약 67조원)에 달하는 막대한 예산을 쏟아 붇기로 했다. 이어 미국, 한국, 일본, 대만 등 중국을 제외한 반도체강국들의 동맹인 ‘칩4(Chip 4)’까지 결성하면서 대중국 반도체 견제를 더욱 강화했다.
반도체 자립 '굴기' 나선 中... 효과는 미미
물론 중국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세계 최대 규모인 자국의 반도체 소비량과 해외 의존도를 일찍이 깨달은 중국은 자립을 준비해왔다. 이른바 ‘중국 반도체 굴기’다. 미중 무역갈등이 본격화되기 훨씬 이전인 2014년 ‘반도체 산업발전 추진요강’을 발표하고 약 24조원 상당의 대규모 투자펀드를 조성해 자국 반도체 기업들의 첨단기술 개발과 경쟁력 강화를 촉진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그러나 성과는 좋지 않다. 2018년 기준 불과 4년만에 중국 내 반도체 생산량은 2배 이상 증가했으나 자체 수요 충족은 물론이고 기술 수준의 격차도 따라잡지 못했다. 미국과 한국이 10nm 이하 초정밀 반도체 공정 제품 양산을 시작할 때 중국은 그보다 훨씬 뒤처진 20~30nm 양산에도 실패하며 좌절을 맛봐야 했다.
그동안 막대한 인력과 자본, 광활한 내수 시장을 바탕으로 주요 산업을 빠르게 잠식해 온 중국이지만 반도체 기술 초격차를 좁히는 일은 쉽지 않음이 드러나고 있다. 업계에 따르면 중국 반도체 굴기는 펀드자금의 효율적인 분배 실패, 부정부패, 인력 이탈 등의 총체적 문제 요소가 지적되며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는 상황이다.
게다가 오랜 미중 갈등 사이에서 ‘중립’을 유지했던 유럽연합(EU)도 최근 첨단 반도체 자국주의를 본격화하며 경쟁 구도를 확대하고 있다. 관련해 지난 4월 EU는 430억유로(약 61조원)를 투입해 EU 반도체 산업을 육성하기로 합의했다. 2030년까지 민간 및 공공 분야에서 EU의 반도체 시장 점유율을 20%까지 확대하는 것이 핵심이다.
이는 중국 입장에선 결코 달갑지 않은 경쟁자의 등장이며, EU 또한 미국을 중심으로 고착화되는 반도체 리더십에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는 의미다. 전세계 소재·부품·장비(소부장) 중 가장 핵심이라 볼 수 있는 반도체의 ‘무기화’가 국가와 산업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미중 갈등에서 구체화된 영향도 있다.
반도체만 죽인다고 끝? 소비재·자원 中 영향력 막강...美 기업들도 반발
다만 반도체 외 영역에서는 중국의 선방도 만만치 않다. 중국의 여전히 값싼 노동력과 생산성, 중국이 우위를 점하고 있는 여타 소재 및 식량, 소비재, 자원 등에서는 막강한 영향력을 자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중 무역갈등이 본격화된 이래 2020년 미국의 대중국 상품무역 적자는 1년만에 오히려 1010억달러(약 130조원) 증가한 것으로 확인된다. 게다가 2022년에는 중국과의 무역 규모가 2018년 이후 최대인 6807억달러를 기록, 양국의 단절은 사실상 불가능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무엇보다 중국 시장에 대한 상품 판매 의존도가 높았던 미국 기업들도 적잖은 피해를 호소하고 있다. 이에 정부에 공개적으로 반발하기도 했다. 대표주자는 전세계 전기차 시장의 선두주자인 테슬라다. 이미 2020년 테슬라와 포드를 포함한 3500여개 미국 기업이 이미 트럼프 정부의 대중 무역전쟁을 비판한 바 있다.
이어 비교적 최근인 지난 5월30일, 3년만에 중국을 방문한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는 친강 중국 국무위원겸 외교부장과 회동하는 자리에서 “미국과 중국의 이익은 서로 얽혀 있기 때문에 양국의 공급망 분리과 단절에 반대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처럼 미국의 주요 기업들마저 장기화된 미중 갈등의 해소를 요구하는 건 양국의 갈등이 비단 반도체 뿐 아니라 다양한 소비 산업의 위축과 기업의 활동 제약으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양국의 관계 개선은 앞으로도 쉽게 이뤄지지 않을 전망이다. 미국 정부는 반도체에 이어 올해 친환경 전기차 산업 육성에 초점을 둔 인플레이션감축법(IRA)에서 중국산 전기차용 배터리 소재와 부품 등의 사용을 전격 배제하는 항목을 다수 명시하며 또 한번의 중국 배제 의지를 드러낸 까닭이다.
반도체와 달리 배터리는 중국이 핵심 원소재 공급망의 대부분을 쥔 산업이다. 미국은 자국 기업 중 배터리 제조 및 소부장 영역에서 걸출한 기업이 아직 없는 상황이고, 주요 파트너 국가들의 중국 의존도는 상당한 수준이다. IRA는 이들 제조·공급망을 한시 빨리 미국 본토나 미국 동맹국들 중심으로 재편하기 위한 시도다. 반도체에서 쓴 맛을 본 중국이 배터리 무기화로 반격에 나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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