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데일리 김도현 기자] 언성히어로(Unsung Hero). 우리나라 말로는 ‘보이지 않는 영웅’이라는 뜻입니다. 눈에 띄지는 않지만 묵묵히 꼭 해야 할 일을 하는 이들을 지칭합니다. 국내 반도체 산업의 역사적인 현장에서 업계 언성히어로를 만나볼 수 있었습니다.
지난 25일 삼성전자는 “경기 화성캠퍼스 V1 라인에서 차세대 트랜지스터 GAA(Gate All Around) 기술을 적용한 3나노미터(nm) 반도체 수탁생산(파운드리) 제품 출하식을 개최했다”고 밝혔습니다.
영웅들을 소개하기 전에 삼성전자의 GAA 기반 3nm 반도체에 대해 설명드리겠습니다. 3nm는 머리카락 굵기 10만분의 3 수준인데요. 반도체 회로 간 거리(선폭)를 의미합니다.
반도체는 말 그대로 전류가 흘렀다 안 흘렀다 하는 전자부품인데요. 트랜지스터는 전류 흐름을 조절하는 역할을 합니다. 트랜지스터는 게이트(전류가 드나드는 문)와 채널(전류가 흐르는 길)로 이뤄집니다. 문과 길이 가까울수록 전류가 이동하는 거리가 짧아지는 덕분에 전력효율이 높아집니다. 아울러 접촉면이 많을수록 전류 흐름을 세밀하게 제어할 수 있습니다.
현재 반도체 업계에서는 지느러미 모양의 ‘핀펫(FinFET)’ 트랜지스터가 보편화돼 있습니다. 게이트와 채널이 닿는 면이 3곳이죠. 다음 버전인 GAA를 직역하면 ‘게이트 모든 부분을 둘러싼다’입니다. 결과적으로 핀펫보다 하나 더 늘어난 4면 접촉입니다. 참고로 삼성전자는 2000년대 초부터 GAA 연구를 시작했다고 하는데요. 약 20년 만에 상용화된 것이죠.
여기에 또 다른 기술이 가미되는데요. 채널을 와이어 형태에서 얇고 긴 모양의 나노시트로 변경했습니다. 삼성전자는 자체적으로 MBC(Multi Bridge Channel)라고 부릅니다. 이를 통해 게이트와 채널이 닿는 면적을 넓힌 것이죠.
좀 더 와닿게 설명하면 GAA 3nm 반도체는 핀펫 5nm 반도체 대비 ▲성능 30% 향상 ▲전력 소모 50% 절감 ▲면적 35% 축소 등 효과가 나타난다고 합니다.
이번 출하로 삼성전자는 세계 최초 GAA(MBC 기술 포함)와 3nm 반도체라는 2가지 타이틀을 얻게 됐습니다. 파운드리 선두주자 대만 TSMC는 2025년 전후로 양산할 2nm 반도체에서 GAA 기술을 도입할 예정인데요. 차세대 트랜지스터 분야에서는 삼성전자가 2~3년 이상 앞서게 된 셈입니다.
다시 V1 라인으로 돌아오겠습니다. 네덜란드 ASML의 극자외선(EUV) 설비가 별도로 설치된 라인이죠. V1은 17라인(D램) 및 S3(파운드리)와 연결된 팹으로 2개 공장에서 EUV 노광 공정이 필요할 때 들리는 곳입니다. 이날 출하한 고성능 컴퓨팅(HPC) 반도체는 S3에서 생산한 것이죠.
출하식에는 산업통상자원부 이창양 장관, 삼성전자 디바이스솔루션(DS)부문장 경계현 대표 등이 참석했습니다. 이 자리에는 협력사와 반도체 설계(팹리스) 업체 주요 인사들도 함께했는데요. 삼성전자에 따르면 ▲대덕전자 김영재 대표 ▲동진쎄미켐 이준혁 대표 ▲솔브레인 정현석 대표 ▲원세미콘 김창현 대표 ▲원익IPS 이현덕 대표 ▲피에스케이 이경일 대표 ▲케이씨텍 고상걸 부회장 ▲텔레칩스 이장규 대표 등이 방문했습니다.
8개 회사를 업종별로 나누면 소재 2곳(동진쎄미켐 솔브레인), 부품 1곳(대덕전자), 장비 3곳(원익IPS 피에스케이 케이씨텍), 팹리스 2곳(원세미콘 텔레칩스) 등으로 구분됩니다.
우선 동진쎄미켐과 솔브레인. 두 회사는 일본 수출규제 이후 소재 국산화 주역으로 꼽힙니다. 각각 EUV 포토레지스트(PR)와 초고순도 불화수소를 개발하면서 일본 의존도를 낮췄습니다. PR은 노광(회로를 그리는), 불화수소는 식각(불필요한 회로 벗겨내는) 단계에서 주로 쓰이는데요. 반도체 공정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다음 기회로 미루겠습니다.
양사는 초미세 공정에 필수적인 에천트, 현상액, 시너 등도 공급하는데요. 노광 공정 이후 불필요한 불순물을 세척하고 제거하고 깎는 소재들입니다. 3nm 반도체의 EUV 적용 이후 사용되는 제품들이죠.
동진쎄미켐과 솔브레인은 삼성전자가 올해 하반기 착공하는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시 파운드리 신공장 수요 대응 차원에서 현지 소재 생산라인을 구축할 것으로 전해집니다. 삼성전자 일정에 맞춰 2024년부터 가동 전망입니다.
다음으로 대덕전자. 이 회사는 반도체 패키지 기판을 만듭니다. 말 그대로 패키징하는 기판으로 반도체 전공정을 마치고 후공정에 활용되는 제품입니다. 반도체를 외부 충격으로부터 보호하고 적용 디바이스와 연결하기 위해 포장(패키징)할 때 쓰는 포장지 같은 존재입니다. 반도체처럼 회로 새겨져 있어 인쇄회로기판(PCB)이라고도 부릅니다.
대덕전자는 삼성전기 등과 함께 플립칩(FC)-볼그리드어레이(BGA)에 대규모 투자를 단행하고 있는데요. FC-BGA에 대해서는 7월17일 출고한 <"인텔도 애플도 간절"…'녹색 괴물' FC-BGA 뭐길래> 기사를 참고하시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간단히 언급하면 PCB 중 가장 높은 몸값과 성능을 자랑하는 기판입니다. 중앙처리장치(CPU)와 그래픽처리장치(GPU) 등 HPC 칩 패키징에 적용됩니다. 이날 출하한 HPC 제품 설계업체가 중국 주문형반도체(ASIC) 기업으로 알려진 가운데 대덕전자의 FC-BGA가 도입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제 장비 협력사들을 이야기할 차례인데요. 이 분야는 미국(어플라이드머티어리얼즈 램리서치) 유럽(ASML) 일본(TEL) 등이 우수한 기술력을 갖추고 있는데요. 특히 전공정(웨이퍼 제조부터 금속 배선까지) 설비는 진입장벽이 원체 높아 국내 기업이 여전히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날 등장한 원익IPS, 피에스케이, 케이씨텍 등은 각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일단 원익IPS는 삼성 계열사 세메스와 토종 장비업계 양대 산맥을 이룹니다. 한국의 어플라이드라 불릴 정도로 양과 질 모두 국내 최대 수준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증착(박막을 쌓아 올리는) 및 열처리 장비를 납품합니다. 앞서 TEL이 주도해온 메탈 화학기상증착(CVD) 장비를 국산화하기도 했습니다. 반도체 내 전기 신호가 잘 전달되도록 하는 금속 배선 공정에 쓰입니다.
최근에는 EUV 공정과 연계 가능한 원자층증착(ALD), 하드마스크 증착 관련 제품도 연구개발(R&D) 진행 중인 것으로 파악됩니다. 그동안 삼성전자 메모리 비중이 높았다면 점차 파운드리 설비도 늘어날 것으로 보입니다.
피에스케이는 확실한 무기 하나가 있는데요. PR 스트립 장비가 주인공입니다. 노광 이후 남겨진 PR 찌꺼기를 제거하는 임무를 수행합니다. 피에스케이 제품은 플라즈마를 활용한 건식(드라이) 방식인데요. 플라즈마는 기체가 초고온 상태로 가열돼 전자와 양전하를 가진 이온으로 분리된 상태를 일컫습니다. 해당 시장에서는 램리서치 등을 제치고 점유율 1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램리서치가 독점해온 베벨 에처 내재화에도 도전 중입니다. 베벨은 웨이퍼의 둥근 가장자리인데 웨이퍼 경사면에 남아있는 금속 또는 비금속 막을 제거하는 것이 베벨 에처 역할입니다. 반도체 수율(완성품 중 양품 비율) 개선에 도움을 주는 장비죠.
케이씨텍은 화학기계연마(CMP) 전문가로 유명합니다. 관련 소재와 장비 모두 제공합니다. CMP 장비는 화학적 반응과 기계적 힘을 이용해 웨이퍼 표면을 평탄화하는 제품인데요. 소재로는 CMP 슬러리가 사용됩니다. 웨이퍼와 폴리우레탄 소재로 만드는 CMP 패드 사이에 슬러리를 넣고 회전시키는 방식으로 연마합니다. 참고로 CMP 슬러리는 동진쎄미켐과 솔브레인도 공급합니다.
웨이퍼 외에도 MBC 기술에 쓰인 나노시트 구조 형성을 위해서는 고성능 CMP 공정이 필수적인데요. 이 과정에서 케이씨텍이 주요한 역할을 맡은 것으로 보입니다.
끝으로 소개할 기업은 원세미콘과 텔레칩스입니다. 앞서 나온 6개 소부장 업체가 삼성전자 협력사라면 두 곳은 고객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향후 3nm 반도체 생산을 맡길 가능성이 있는 것이죠.
원세미콘은 레지스터클럭드라이버(RCD) 등 집적회로(IC)를 개발 및 설계하는 업체입니다. RCD는 메모리 버퍼인데요. 데이터 송수신 시 신호 왜곡을 방지하는 작업을 수행합니다. 텔레칩스는 차량용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가 주력입니다. 자동차에 탑재하는 마이크로컨트롤러유닛(MCU)도 준비 중이죠.
지난달부터 일본 대표 경제지 닛케이신문은 삼성전자를 비롯한 한국 반도체를 깎아내리고 있는데요. 국내 소부장에 대해서는 갈 길이 멀다는 평가를, 삼성전자 3nm 반도체에 대해서는 의구심을 품었습니다. 해당 매체의 비판과 별개로 삼성전자는 3nm 반도체 양산에 돌입했고 그 뒤에는 여러 협력사가 힘을 보태고 있었음을 이번 출하식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