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을 정리하다 수십년 묵은 책을 펴보면서 시간이 정지된듯 깊은 회상에 잠길때가 있다. 색이바랜 책갈피와 포스트잇 메모지에 적은 다짐, 의미를 알 수 없는 낙서와 그 당시에는 아련했던 누군가의 이름까지, 반갑기도하고 살짝 당황스럽기도하다.
'그 당시에 꿈꿨던 많은 것들, 과연 지금까지 얼마나 이뤄졌을까'. 살다보면 생각지도 않게 과거의 기억들이 불쑥 불쑥 소환되곤 한다.
최근, 1993년의 아려한 기억이 갑자기 소환됐다.
지난 25일 열린, 국정농단 파기환송심 재판에서 정준영 부장판사(서울고법 형사1부)는 재판 말미에 이재용 삼성 부회장에게 예상치 못한 훈계를 했다. 1993년 프랑크푸르트에서 부친인 이건희 회장이 '삼성 신경영'을 선언하고 위기를 극복했는데, 2019년 이재용 회장의 선언은 무엇이냐는 것이 내용. (물론 '꾸짖다'라는 의미의 훈계라기 보다는 당부에 가깝게 들린다.)
'삼성의 프랑크푸르트 선언', 이미 숱하게 미디어에 언급됐고, 수많은 경영학 서적에도 인용될 정도로 유명하지만 어느샌가 우리가 까맣게 잊고 지냈던 일화다.
시간을 26년전으로 돌려보자. 1993년6월부터 8월까지, 당시 만 51세의 이건희 회장은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시작해 일본 도쿄에 이르는 주요 글로벌 거점 도시에서 그룹 사장단과 임원, 해외 주재원 등을 대상으로 교육과 특강을 진행했다. 대화시간만 350시간에 이르는 강행군이었다. 사진 속, 프랑크푸르트 캠핀스키 호텔에서 회의를 주재하는 이건희 회장은 매우 젊다.
글로벌 시장에서 통하는 일류제품을 만들기위해서는 모든 낡은 관습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이 회장의 주문, '마누라와 자식을 빼놓고 다 바꾸라'는 거친 말에는 아직도 온기가 느껴질만큼 간절함이 묻어난다.
이렇게 시작된 삼성의 '신(新) 경영'은 불량율 제로(0)라는 극단적인 품질경영을 목표로, 곧바로 실행에 옮겨진다. 1995년, 150억원에 달하는 무선전화기 15만대를 공장 앞마당에 쌓아놓고, 임직원들이 지켜본 가운데 진행한 화형식은 이런 의지가 빈말이 아니었음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지금도 회자된다.
삼성은 '신경영'을 선언하면서 당시 글로벌 시장을 주름잡던 각 분야의 미국, 유럽, 일본의 글로벌 기업들을 벤치마킹했다. 애플, IBM, 마이크로소프트, HP, 미쯔비시, 소니, 모토로라, NCR, 제록스 등이 그런 기업들이다.
물론 이 회장은 국가경쟁력에 대한 답답한 속내도 숨기지 않았다.
1995년4월, 이 회장은 베이징에서 가진 특파원들과의 대화에서“한국 정치는 4류, 관료 행정은 3류, 기업은 2류” 라는 폭탄 발언을 날렸다. 규제 혁신에 미진한 당시 정치권과 행정부를 직격한 것이다.
그러나 이 발언은 YS 정권의 심기를 건드렸고, 삼성은 적지않은 후푹풍을 감내해야 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 회장은 요즘 기업 총수들과는 달리 거침없는 돌직구 화법의 소유자였던 것 같다.
10여년 뒤, 삼성의 '신경영' 전략은 놀라운 결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2019년 현재, 삼성이 그렇게 벤치마킹하고자 했던 주요 글로벌 기업들중 상당수는 이미 삼성전자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시장에서 아예 사라져버린 기업도 있다.
삼성전자는 현재(2018년말 기준) 세계 반도체 시장 1위다. 오히려 삼성이 이제는 누군가의 벤치마킹 대상이 되고 있고, 견제의 대상, 질시의 대상, 타도의 대상이 되고 있다.
물론 삼성이 초일류를 지향하면서 강조한 것은 품질경영만이 아니었다. 혁신은 조직원의 자발성이 동반되지 못하면 생명력이 짧을 수 밖에 없다. 결국 조직 '문화'(Culture)로 승화돼야만 혁신이라는 긴 레이스를 완주할 수 있다.
삼성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인사 개혁을 실행에 옮겼다. 출신 대학을 차별하지않는 학력철폐, 철저한 성과주의를 통한 능력 중심의 '문화' 확립은 지금의 삼성을 성장케 한 진짜 원동력이다. 이는 여전히 학벌주의에서 파생된 갖가지 문제로 신음하고 있는 한국 사회의 현실에 비추어 높게 평가받아야 할 부분이다.
만약 이 회장이 건강을 회복해 지금 다시 임직원들 앞에서 마이크를 잡게된다면 과연 무슨 말을 할까.
초격차, 4차 산업, 인공지능(AI), 현재 시장 이슈를 강력하게 선점하고 있는 핵심 키워드들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 그의 혜안이 궁금하다.
모르긴 몰라도 이 회장은 하고싶은 말이 참 많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 질문은 빼놓지 않고 던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