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데일리 백지영기자] 12일(현지시간) 국내에선 개인용 컴퓨터(PC) 기업으로 잘 알려진 델이 전세계 1위 기업용 스토리지 기업인 EMC를 인수했다. 인수가격만 670억달러(한화로 약 77조원)에 달하는 IT 업계의 최대 규모의 빅딜이다.
이번 인수로 델은 EMC 뿐만 아니라, EMC의 자회사인 VM웨어와 피보탈, RSA, VCE 등의 자회사까지 손에 넣었다. 인수가 완료되면 델은 최대 B2B(기업 대 기업) 기업으로 등극할 전망이다.
EMC는 델과의 합병에 동의하면서 2개월(60일) 간의 고숍(Go-shop) 조항을 포함시켰다. 이 기간 동안 델보다 좋은 조건으로 인수 제안을 하는 업체가 있다면 계약 파기가 가능하지만, 현재로선 670억달러 이상을 제시하는 곳은 없을 듯하다. 2개월 이후 인수가 확정되면, 양사는 내년 5월까지 합병을 완료할 계획이다.
그렇다면 한국 지사들의 통합은 어떻게 진행될까.
일단 별도의 상장사로 남게 되는 VM웨어의 경우, 지금처럼 독립적인 형태로 운영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EMC와 델의 한국지사는 본사의 인수가 확정되면 국내서도 조직 통합이 불가피하다.
현재 델의 본사는 미국 남부인 텍사스주 오스틴, EMC는 미국 동부 매사추세츠주 홉킨톤에 있는 만큼 양사의 기업 문화는 상당히 다르다.
이는 한국 지사 역시 마찬가지다. 그동안 한국EMC는 금융과 제조 등 대기업을 중심으로 영업을 전개해 온 만큼, 확고한 고객 기반을 갖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EMC의 제품은 한번 공급되면 빠져나오기 힘든(lock-in) 폐쇄적인 느낌이 들 정도로 고객층이 탄탄하다.
반면 델코리아는 PC를 기반으로 서버, 스토리지, 네트워크 등 기업용 제품으로 사업 영역을 확장해온 만큼 대기업보다는 규모가 작은 중소기업 위주의 영업을 해 왔다. 게다가 몇 년 전까지는 직접 영업만 진행했다.
델은 또한 다른 외국계 지사에 비해 비교적 타이트한 조직 문화를 갖고 있다. 오죽하면 외부에서 델코리아를 빗대어 ‘보험회사’라고 부를 정도다. 제품 측면에서 봤을때 델은 개방성(open), 확장성(capable), 합리성(affordable) 등을 내세우며 타사의 제품을 함께 판매할 정도로 오픈 전략을 취해왔다.
우선 매출규모를 놓고 보면 델코리아와 한국EMC는 비슷한 수준이다. 두 회사 모두 국내에는 1995년 설립됐으며, 지난해를 기준으로 델코리아는 3248억원, 한국EMC는 3234억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다만 영업이익이나 순이익은 한국EMC가 월등히 높은 편이다. 직원수 역시 델코리아가 258명, 한국EMC가 493명으로 한국EMC가 두 배 정도로 많다.
이 때문에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조직통합과는 다른 상황이 연출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외형상 델이 EMC를 인수하는 격이지만, 각국 지사별로는 그 규모에 따라 조직통합의 방식이 다를 수도 있다. 일례로 지난 2005년 시만텍이 베리타스를 인수했을 때, 국내에선 오히려 규모가 컸던 베리타스가 시만텍을 합병하는 모습이 연출되기도 했다.
통합 기업의 지사장 역시 관심이다. 현재 한국EMC는 지난 2003년부터 김경진 사장이 13년째 이끌고 있다. 1957년생인 김 사장은 국내 IT업계에선 최장수 CEO다. 그는 지난 2008년부터는 본사 부사장(2010년부턴 수석 부사장)도 맡고 있을 정도로 한국EMC 내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갖고 있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델코리아의 경우, 2013년부터 김경덕 사장이 이끌고 있다. 1966년생인 김 사장은 IBM과 시스코를 거쳐 지난 2011년 대기업 영업팀 전무로 델코리아에 입사한 이후, 공공 및 중소기업 영업부문을 총괄하다 2년 전 사장으로 승진했다.
그가 부임하기 전 델코리아는 외국인 사장 체제였다. 통합 지사장은 델이 향후 어떠한 통합 전략을 짜느냐에 따라 가늠할 수 있을 전망이어서 사실상 현재는 예상하기 힘들다.
한편 이번 인수합병에 따라 델은 PC부터 x86 서버, 가상화 소프트웨어(SW), 스토리지, 네트워크, 보안, 빅데이터 등 기업용 제품의 거의 전 영역을 확보하게 됐다. 특히 기존에 저가 제품(?)으로 치부되던 기업 인지도를 EMC 합병을 통해 끌어올릴 수 있을지 주목된다. 여전히 기업용 IT인프라 시장에선 서버와 스토리지를 함께 공급하는 경향이 높기 때문에 양사의 시너지가 얼마나 발휘될지도 관심이다.
지난 2010년 오라클이 썬마이크로시스템즈를 인수하면서 엑사데이타 등 어플라이언스 영역의 새로운 장을 열었던 것처럼, 델의 x86 서버와 EMC의 스토리지, VM웨어나 피보탈의 가상화·클라우드, 데이터웨어하우스(DW) 소프트웨어(SW) 등이 통합된 어플라이언스 제품이 등장하며 오라클의 대항마로 자리잡을 수도 있다.
개별 제품별로 살펴보면, 현재 델과 EMC의 사업 영역에서 겹치는 제품은 스토리지 일부를 제외하곤 거의 없다. 스토리지 역시 그동안 델은 로엔드(소형) 제품, EMC는 하이엔드(대형) 제품에 주력해 온 만큼 사실상 경쟁관계로 보기엔 어려운 측면이 있다. 최근 양사 모두 올 플래시 스토리지 시장에 주력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초기단계다. 특히 스토리지 시장은 지난 몇 년 간 하향세에 있기 때문에, 이 분야에서 구조조정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무엇보다 효율성과 합리성을 중시하는 델의 기업문화를 감안할 때, 엄청난 규모의 구조조정이 수반될 것으로 예상된다는 것이 관련 업계의 분석이다. 이는 국내 지사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된다. 실제 지난 12일 인수발표 당시 마이클 델 회장은 “비용절감과 관련해 확실한 시너지 요인이 있기 때문에, 구조조정이 없을 것이라는 말할 수 없다”고 밝힌 바 있다.
한 업계 관계자는 “델은 M&A 의사결정을 내릴 때 현재 제공하고 있는 사업 영역을 확장해 나갈 수 있는지, 새로운 고객 유치가 가능한지, 기술 신뢰도나 규모를 바탕으로 빠른 시간 내에 새로운 비즈니스로의 편입이 가능한지 3가지를 판단하고 인수를 진행한다”며 “인수 이전부터 물밑에선 엄청난 논의가 있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백지영 기자>jyp@d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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