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시간
뉴스

반도체

위기의 인텔, D램 처럼 PC 칩 사업을 포기할 수 있을까

[IT 전문 블로그 미디어=딜라이트닷넷]

인텔이 PC용 마이크로프로세서 사업을 막 시작했던 1980년대 중반. 앤디 그로브는 CEO였던 고든 무어에게 “새로운 CEO를 영입한다면 어떤 결정을 할 것 같으냐”고 물었다. 무어는 “D램 사업을 접을 것 같다”는 답변을 했다. 1970년대 D램을 최초 개발한 인텔이 해당 사업을 정리한다는 것은 당시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무어의 뒤를 이어 인텔의 3대 CEO가 된 앤디 그로브는 D램 사업을 포기한다. 당시 인텔은 D램 공장을 폐쇄하고 8000명이 넘는 직원을 해고하는 등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인텔이 D램 사업을 포기했던 이유는 경쟁 심화로 수익을 내기가 어렵다고 봤기 때문이다. D램은 고도의 설계 능력보단 생산 공정 기술이 경쟁력을 좌우한다. 당시 인텔은 우월한 생산 능력을 가진 일본전기, 도시바, 미쓰비시, 히타치 같은 일본 굴지의 전자 회사들의 원가 경쟁력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결과적으로, 인텔의 D램 사업 포기는 탁월한 결정이었다. PC용 마이크로프로세서 사업에 집중한 인텔은 1990년대 매년 30% 이상 매출 성장률을 보였고 2012년 현재 연간 매출 500억달러가 넘는 세계 제 1의 반도체 소자 업체로 거듭났다. D램 사업에만 집중했다면 삼성전자, SK하이닉스와 같은 한국 D램 업체에 밀려 파산한 독일의 키몬다, 일본의 엘피다 같은 신세가 됐을 지도 모를 일이다. 과감한 구조조정으로 지금의 인텔을 있게 만든 앤디 그로브 전 CEO는 ‘세기의 전략가’로 칭송받고 있다.


근래 들어 인텔은 마이크로프로세서의 최대 수요처인 PC 시장의 역성장으로 새로운 위기를 맞고 있다. 2012년 인텔의 연간 매출은 533억달러로 전년 대비 1.2% 감소했고 영업이익은 146억달러로 16.2%나 줄어들었다. 인텔은 세계 경기 불안으로 지난 2008년과 2009년에도 매출 역성장세를 기록한 적이 있다. 그러나 지난해 매출 감소세를 불안한 세계 경기 탓으로만 돌리기는 어렵다. 스마트폰 칩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퀄컴은 지난해 전년 대비 30%에 가까운 매출 성장세를 보였다. 인텔이 스마트폰 칩 시장에 성공적으로 안착했더라면 매출이 큰 폭으로 늘어났을 것이다.


문제는 현재 스마트폰 시장의 상황, 예컨대 삼성과 애플의 양강 구도 및 자체 칩 설계 능력을 고려하면 인텔의 스마트폰 칩 시장 진입은 여전히 요원해 보인다는 것이다. 올해도 PC 시장은 한 자릿수 초반대의 역성장이 예상되고 있다. 페달을 밟지 않는 자전거는 넘어지고 말 듯 매출 역성장세를 지속하면 공룡 인텔은 결국 고꾸라질 수 밖에 없다는 분석도 나온다.


파운드리(위탁생산)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고 있는 인텔의 행보는 여러가지 해석을 낳고 있다. 인텔은 최근 세계 2위 프로그래머블반도체(FPGA) 업체인 알테라와 14나노 핀펫(인텔 기술명 트라이게이트) 공정 파운드리 계약을 맺었다고 발표했다. 이에 앞서 인텔은 아크로닉스의 FPGA인 ‘스피드스터 22iHD1000’의 샘플을 22나노 3D 핀펫 공정으로 생산한 바 있다.


인텔이 시장의 흐름을 따라가는 데에는 늦었지만 기술 경쟁력은 여전히 업계에서 으뜸이다. 신소재인 하이케이메탈게이트(HKMG)를 가장 먼저 도입한 업체는 바로 인텔이다. 3D 핀펫 공정 도입 역시 인텔이 가장 앞섰다. 극자외선(EUV) 노광기 개발 및 450mm 웨이퍼 전환 등도 인텔이 주도하고 있다. 크레이그 배럿 전 CEO가 도입한 ‘카피 이그잭틀리(Copy Exactly)’ 프로그램은 여전히 공장을 가진 전 세계 반도체 업체들이 벤치마킹하고 있는 혁신 사례이기도 하다. 카피 이그잭틀리는 공정 방식과 제조 장비를 표준화해 새로운 생산 공정이 개발되면 전 세계 모든 공장에서 동일한 품질로 동일한 제품을 만들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이러한 무기를 가진 인텔이 꺼내들 카드는 많다. 삼성전자 마냥 독자 칩 생산과 파운드리 사업을 병행하는 아슬아슬한 ‘적과의 동침’을 통해 슬금슬금 모바일 시장으로 진입한다는 계획을 세울 수도 있을 것이다. PC용 마이크로프로세서 시장은 인텔이 80% 이상의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경쟁자가 많았던 D램 사업처럼 전격적으로 포기할 가능성은 적어보인다.


인텔의 5대 CEO인 폴 오텔리니는 오는 5월 사임한다고 한다. 어떤 인물이 인텔의 차기 CEO가 될 지 알려지지 않았으나 과거 고든 무어와 앤디 그로브처럼 새롭고 파격적인 장기 비전을 수립하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한주엽기자 블로그=Consumer&Prosumer]

디지털데일리 네이버 메인추가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