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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정부에 바란다⑤] 美中 사이 새우등 된 K-배터리…한국판 IRA 절실

2025년 현재, 디지털산업은 다시 한번 거대한 전환기를 맞고 있다. 정치·경제·기술 전반에서 혼돈과 격변이 일상화되는 시대, 우리 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 명확한 방향성과 신뢰할 수 있는 정보가 절실하다. 이에 디지털데일리는 창간 20주년을 맞아 ‘혼돈의 전환기, 산업정책의 나침반을 묻다’를 주제로 창간 특집기획을 마련했다. 이번 특집에서는 ‘새 정부에 바란다’는 대기획 아래, 통신·방송·반도체·AI·보안·게임·유통 등 산업별 핵심 이슈를 심층 분석하고, 각계 전문가의 릴레이 인터뷰를 통해 산업계와 정책 간의 건설적인 대화를 이어가고자 한다. 또한 유력 대선주자의 ICT 공약 분석을 통해 새로운 리더십 아래 산업계가 나아갈 좌표를 함께 고민해 본다.[편집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AP=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AP=연합뉴스]

[디지털데일리 고성현 기자] 반도체에 이은 국내 핵심 첨단전략산업으로 떠오른 배터리 업계가 연일 발생하는 미국발 정책 리스크에 휘청이고 있다. 관세 부과 조치로 원료·설비 비용이 증가할 것이 예상되는 가운데, 굳건했던 미중 갈등에 따른 수혜 요소와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혜택이 사라질 가능성이 대두되는 탓이다. 이에 따라 배터리 업계에서는 국내 기업의 사업 지속성을 위한 지원안을 비롯해 에너지저장장치(ESS) 등 내수 시장 확대와 연구개발(R&D)에 대한 규제 완화 등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업계에 따르면 최근 미국 국회에서는 IRA의 전기차 세액공제를 폐지하고 배터리 셀에 대한 생산세액첨단공제(AMPC)를 단계적으로 폐지하는 안이 추진되고 있다. 미국 하원 세입위원회 공화당 의원들이 12일(현지시간) 공개한 세제 법안 초안에서 IRA의 전기차 세액공제를 2027년에 폐지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세액공제 시한을 당초 2032년 말에서 2026년 말로 앞당기면서다.

특히 2026 과세연도에 구매한 전기차의 경우 생산 업체가 2009년 말부터 2025년 말까지 미국에서 판매한 전기차가 20만대를 넘으면 세액공제 대상에서 제외하도록 했다. 이렇게 되면 세액공제는 실질적으로 올해 종료될 가능성도 생긴다.

국내 배터리 업체의 현지 법인에 적용되는 AMPC는 단계적으로 폐지하는 시기가 1년이 앞당겨지는 내용이 담겼다. 미국과 중국 간 무역 갈등으로 인한 공급망 블록화와 AMPC를 기반으로 공격적인 투자를 집행하던 국내 배터리 업계의 발등에 불이 떨어진 셈이다. 현재 업계 내 대다수 배터리 셀, 소재 기업들이 적자인 점을 고려하면, 수익성을 보완하는 AMPC가 일찍 폐기될수록 발생하는 손해를 메꾸기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트럼프 대통령이 4월 초 발표한 관세 부과 조치 국면도 새로운 전환점을 맞았다. 대다수 국가에 대한 상호관세 적용이 7월로 미뤄지며 숨통이 트였지만, 중국 기업의 북미 진입장벽이 될 것으로 봤던 대중국 관세도 인하된 탓이다. 현재 중국 기업은 고성능 전기차 하락세와 보급형 차량 확대 등을 기반으로 저가형 제품인 리튬인산철(LFP) 배터리 글로벌 공급량을 확대하는 추세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국내 배터리 산업을 보호하기 위한 정책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미국과 유럽, 중국 등이 대규모 자금 지원이나 타국 진입 규제로 주도권을 잡은 반면, 국내의 경우 이에 대한 지원 정책이 부족하다는 이유에서다. 중국은 내수 시장 내 전기차 전환율을 강제적으로 끌어올리는 법안과 함께 자국 배터리사에 대규모 공적 자금을 투입해왔고, 타국의 내수 시장 진입을 사실상 제한하면서 이들의 성장세를 뒷받침했다. 미국 역시 IRA과 관세 등 조치로 해외 기업에 대한 현지 투자 유도 및 자국 기업 지원을 지속한 바 있다.

전력망용 ESS 배터리 컨테이너 제품. [ⓒLG에너지솔루션]
전력망용 ESS 배터리 컨테이너 제품. [ⓒLG에너지솔루션]

이에 따라 정부와 국회 등에서는 국내 배터리 기업을 직접 지원하는 '한국판 IRA' 등을 검토하기도 했으나, 국내 정치 불확실성이 가중되고 정쟁이 격화되면서 논의는 멈춘 상태다. 대선 정국에 돌입한 상황에서도 AI, 반도체 등이 지원책에 대한 우선순위로 놓이며 관심 밖으로 밀려나게 됐다.

업계가 지속적인 지원안을 요구하는 이유는 배터리에 대한 주도권이 각 산업에 미칠 영향이 크다는 점 때문이다. AI 산업 확대로 대규모 전력을 독립적으로 지원하는 에너지저장장치(ESS)나 무정전전원장치(UPS)의 근간이 배터리인 데다, 장기적으로 유효한 전기차 시장의 가격을 결정 짓는 핵심 요소기도 하다는 의미다.

한 업계 관계자는 "배터리 산업의 중요성은 AI 인프라가 확대되면서 더욱 늘어났고, 향후 전기차를 비롯한 미래차 산업을 위해서도 국내 기업의 성장과 자급률 확보가 중요하다"며 "원재료 해외 수입 의존도가 높은 상황에서 배터리 제조 주도권마저 사라지게 되면 비싼 가격으로 배터리를 수입하거나 향후 분산전원 등에서 불리하게 작용할 여지가 크다"고 우려했다.

배터리 소재 분야에서도 정부가 생산에 대한 보조금을 주거나 원재료 수급을 공동으로 확보하는 등 역할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온다. 니켈, 리튬, 흑연 등 원료가 배터리 생산원가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만큼, 이에 대한 국산화 공급선을 안정화해야만 전반적인 성장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소재 기업 임원은 "일본 수출 규제 이슈가 있었던 2019년 이후 소재에 대한 국산화도 이뤄져왔지만, 여전히 흑연이나 전구체 등 핵심 원료의 수입 의존도는 압도적으로 큰 상황"이라며 "특히 중국이 대규모 광산투자와 가공 역량을 바탕으로 저가 공세를 이어오고 있어, 이 상황이 유지되면 국내 기업이 글로벌 시장에서 설 자리를 잃을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반면 이러한 업계의 요구안이 국내 상황을 고려할 때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우려도 있다. 한국의 재정 규모나 내수 시장 등을 고려할 때 미국, 중국 등과 동일한 보호정책을 수립하는게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의미다.

또다른 업계 관계자는 배터리 생산이나 투자에 대한 세액공제가 리쇼어링에 일부 도움은 될 수 있겠지만, 내수가 작고 수출에 의존하는 국내 산업 특성상 유효한 역할을 하기 힘들다. 수출에 대한 생산세액공제 등이 적용된다고 하더라도 이를 감당할 재원이 있는지가 문제"라고 했다.

그러면서 "다만 국내 시장이나 환경을 신제품, 차세대 배터리 등이 쉽게 나올 수 있도록 규제를 완화하고 표준화 작업을 선도한다면 경쟁력 확보에 도움이 될 것"이라며 "부족한 국내 석박사급 인재 양성을 위해서도 계약학과보다 더욱 실효적이고 정교한 방안이 나와야 한다"고 언급했다.

화재 발생과 정치적 분쟁 등으로 약화된 국내 ESS 시장을 다시금 활성화해야 한다는 조언도 나온다. ESS가 당분간 국내 배터리 업계의 주력 매출처가 될 것으로 보이고 있어, 이에 대한 점유율 확보와 기술 성숙도를 높여주기 위한 조치가 필요하다는 관점에서다. 국내 ESS 시장은 2010년대 중후반쯤 성장세를 타며 업계의 세계 시장 점유율 선두 달성의 계기가 됐지만, 잇따라 화재로 규제가 강화되고 태양광과 연계한 신재생에너지 공급인증서(REC) 성과 저조로 시장이 붕괴된 바 있다.

이 관계자는 "ESS는 분산 전원에 대한 대두와 AI 데이터센터 증설에 따른 대규모 전력 확보 필요성 등에 따라 보급이 필수적"이라며 "이에 대한 프로젝트나 기회를 열고 R&D를 지속해 기술 저변을 확대하는 것도 일종의 방안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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