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데일리 김보민 기자] 휴렛패커드엔터프라이즈(HPE)가 네트워크 전문 기업 주니퍼네트웍스(이하 주니퍼)를 품기로 결정했다. 인수 추진설이 제기된 지 하루 만에 나온 깜짝 발표다.
다만 국내 시장에 끼칠 영향은 당분간 미미할 전망이다. 네트워크 분야에서 경쟁사 시스코시스템즈(이하 시스코)가 '만년 1위' 타이틀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판도를 뒤집을 만한 전략이 필요한데, HPE와 주니퍼는 인공지능(AI) 기술을 기반으로 승부수를 모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 단숨에 시스코 유력 경쟁사로? 업계 "글쎄"
9일(현지시간) HPE는 공식 성명을 통해 주니퍼를 140억달러(약 18조4000억원)에 인수하는 내용에 합의했다고 밝혔다. HPE는 계약 조건에 따라 주니퍼를 주당 40달러에 품게 된다. 회사 측은 "올해 말 혹은 2025년 초 거래를 마무리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주니퍼도 홈페이지를 통해 인수 소식을 알렸다. 주니퍼는 "이번 인수로 HPE의 네트워킹 사업은 두 배 성장할 전망"이라며 "고객과 파트너에게 폭넓은 선택지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국내에서도 이번 HPE가 주니퍼 인수를 충격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오늘(10일)에서야 주니퍼가 HPE 인수 소식을 한국 조직 직원들에게 알린 것으로 안다"라며 "HPE가 주니퍼를 기존 사업부에 흡수할지, 아니면 자회사 형태로 운영할지 구체화된 것이 없어 경과를 지켜보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네트워킹 사업의 전반적인 업무는 라미 라힘 주니퍼 최고경영자(CEO)가 이끌 전망이다.
HPE는 중소기업, 대기업, 정부 등 다양한 고객을 대상으로 클라우드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업이다. 컴퓨터 장비업체로 유명한 휴렛패커드(HP)의 자회사이기도 하다. HP는 지난 2015년에는 무선랜 솔루션 강자인 아루바 네트웍스(이하 아루바)를 인수해 네트워킹 분야에서 사업을 확장한 바 있다.
일각에서는 HPE가 최근 네트워크 분야에서 지지부진한 모습을 보인 만큼, 이번 주니퍼 인수가 유의미한 전환점이 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주니퍼는 라우터, 무선랜, 스위치, 보안, 네트워킹 관리 등의 분야에서 솔루션을 보유하고 있다.
네트워크 선도 기업인 시스코에 대항할 카드를 쥐었다는 장밋빛 평가도 제기되고 있다. 네트워크 시장은 이전부터 '자갈밭'이라고 불리고 있다. 거래 액수는 크지만 고객이 예상하는 단가가 한정돼 있어, 전략을 다각화해 큰 폭의 마진을 남기기가 까다롭기 때문이다. 시스코와 같은 기존 강자가 살아남기 쉬운 환경인 셈이다. 이러한 시장 분위기 속 HPE와 주니퍼는 각자도생보다 상부상조를 택한 것으로 풀이된다.
다만 업계 내부에서는 회의적인 관측이 다수다. 관련 제품군 영업 이력이 있다고 밝힌 한 관계자는 "국내 시장에서 시스코는 오랜 기간 1위 자리를 내어준 적이 없다"라며 "매출과 기업가치는 물론, 사업 영역 측면에서 시스코와 두 기업을 같은 선상에 놓고 비교하기는 어렵다"라고 설명했다. 다른 관계자 또한 "시스코보다는 비슷한 계열의 솔루션 및 하드웨어 벤더사들이 유의 깊게 볼 가능성이 크다"라고 말했다.
시스코는 HP가 아루바를 품었을 당시에도 동요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번에도 HPE와 주니퍼가 최종 계약을 마무리할 때까지 상황을 지켜볼 전망이다. 두 기업은 담당 규제 기관을 통해 독과점 심사 등의 절차를 거쳐야 인수를 완료할 수 있다.
◆ "AI 네이티브 기반으로 포트폴리오 확장"
HPE와 주니퍼는 향후 승부처로 AI 기술을 활용할 전망이다. 이번 인수 발표에서도 양사는 'AI 네이티브'라는 용어를 반복하며 관련 기술에서 시너지 효과를 내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주니퍼는 최근 몇 년 간 AI 기술을 적용한 네트워킹 관리 및 가시성 솔루션을 강화해왔다. 미스트 AI와 AI 엔터프라이즈 운영(AIOps) 분야에서도 기술력을 키우고 있다. HPE 또한 AI 시스템에 전력을 공급하는 클라우드 컴퓨팅 서비스를 출시한다고 예고하며 관련 기술에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내비쳤다.
HPE는 "이번 거래를 통해 AI 네이티브와 클라우드 네이티브 생태계를 연결하는 동시에 고객들을 위한 추가 혁신을 촉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주니퍼도 이번 발표문에서 "AI는 인터넷이 탄생한 이후 우리가 살고, 일하고, 즐기는 방식을 바꿀 가장 큰 변곡점이나 다름이 없다"라며 "HPE와 함께라면 (고객에게) 엔드-투-엔드 경험과 AI 네이티브 솔루션을 제공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분석가들 사이에서도 양사가 AI 기술에서 시너지 효과를 내는 게 중요하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악사라 바시(Akshara Bassi) 카운터포인트 리서치 수석 분석가는 외신을 통해 "주니퍼는 기존 HPE가 아루바를 통해 공략한 네트워크 사업에서 시너지를 제공할 전망"이라며"데이터센터 영역에서 HPE 제품군을 확장하는 움직임이 있고, AI에 대한 요구가 증가하는 만큼 네트워킹에 대한 수요도 커질 가능성이 있다"라고 내다봤다.
한편 주니퍼 한국 지사는 이번 인수와 관련해 내부 논의를 이어가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공식 입장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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