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데일리 김도현 기자] “느슨해진 반도체 업계에 긴장감을 줬다.”
최근 만난 반도체 업체 임원은 한때 유행한 ‘밈’을 빌려 중국의 7나노(nm) 반도체 관련 논란을 이같이 표현했습니다. 대상은 화웨이의 신규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 ‘기린 9000s’입니다. 사실 7나노는 이제 흔해진(?) 공정인데요. 어쩌다 세계가 발칵 뒤집히게 됐을까요.
이번 사안을 다루기 위해 2010년대 말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트럼프 행정부는 화웨이 통신 장비 수입을 금지하는 조치를 내립니다. 이를 계기로 미·중 무역갈등은 본격화했고 2020년 이후에도 미국은 화웨이를 향해 반도체 제재에 나섭니다.
수위를 점차 높이더니 그해 9월 미국 소프트웨어(SW)와 설비 등을 이용해 개발 및 생산한 반도체를 화웨이에 납품할 수 없도록 합니다.
반도체 분야에서 SW는 케이던스·시높시스, 장비는 어플라이드머티어리얼즈·램리서치·KLA 등이 독과점 구조를 형성하고 있는데요. 이들을 배제하면 어떤 기업도 반도체를 제작할 수 없다고 보면 됩니다. 사실상 ‘화웨이에 반도체를 팔지 말라’는 거죠.
화웨이의 경우 자회사 하이실리콘이 설계한 AP를 대만 TSMC가 양산해왔는데 이때부터 TSMC와 거래가 단절됩니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메모리 협력사들과도 관계가 끊기죠. 스마트폰 핵심 부품을 정상 조달하지 못하면서 애플, 삼성전자 등과 세계 1위를 다투던 화웨이는 순식간에 스마트폰 업계 ‘원 오브 댐(One of them)’이 돼버립니다.
바이든 행정부 들어서도 화웨이 공격은 멈추지 않았고 이 과정에서 하이실리콘은 물론 화웨이마저 존재감이 사라지게 됐죠. 꾸준히 신제품을 내놓고 접는(폴더블) 스마트폰 등을 출시하는 등 나름대로 활동을 펼쳤으나 예전 같은 주목을 받진 못했습니다. 중국에서도 샤오미, 오포, 비보 등에서 밀려버립니다.
그러던 중 지난달 말 반전의 계기를 마련합니다. 오늘의 주인공인 ‘메이트60프로’를 출시한 것이죠. 이달 3일부터 공식 판매 중인데요. 문제는 AP인 기린 9000s인데 반도체 분석 기관 테크인사이츠가 분해한 결과 7나노 공정으로 생산됐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7나노는 회로 간 선폭을 의미합니다. 회사마다 기준이 다르고 집적도 차이는 있으나 통상 7나노 내외 간격을 둔 패턴 기반으로 칩을 일컫습니다.
재밌는 포인트가 7나노는 극자외선(EUV) 도입의 기준점인데요. EUV는 기존 심자외선(DUV) 대비 파장이 약 14배 짧아 세밀한 패터닝을 할 수 있는 최신 노광 기술입니다. 얇은 붓으로 그리거나 배트를 짧게 잡았을 때 정교한 색칠 또는 타격이 가능한 것과 비슷한 원리죠.
삼성전자는 7나노 공정에서 업계 최초로 EUV를 도입한 바 있습니다. 반면 TSMC는 초기에는 DUV로 7나노 칩을 구현하는 방향을 택했었죠. 이를 통해 애플의 ‘A12’ 프로세서를 찍어내기도 했습니다.
7나노에서 각각 EUV, DUV를 활용하면 회로 작업 속도와 횟수 차이가 납니다. 당연히 EUV로 하면 1~2회만으로도 정밀한 패턴을 새길 수 있겠죠. DUV로 하면 한 번에 미세 회로를 그릴 수 없어서 위치를 조정하면서 여러 번 빛을 투사해야 합니다. 반도체 물량이 많지 않다면 오히려 DUV을 채택하는 게 유리할 수도 있습니다. EUV 장비가 압도적으로 비싸기 때문이죠.
하지만 결국 반도체 공장은 대량 생산 체제로 가야 이윤을 남길 수 있죠. 거듭할수록 EUV와 DUV 격차는 줄고 오히려 EUV 설비가 투입된 라인의 생산성과 효율성이 극대화되는 것입니다. 반도체 수탁생산(파운드리) 경쟁력의 척도로 꼽히는 수율(완성품 중 양품 비율)에서도 큰 차이가 나게 되겠죠.
현재 EUV 장비는 네덜란드 ASML이 독점 중인데 미국과 네덜란드가 협의해 중국으로 관련 제품을 보내지 않기로 했습니다. 공식적으로 EUV 설비가 없는 중국이 EUV를 이용한 AP를 만들 수 없겠죠. 이런 상황에서 7나노 AP라니 전 세계가 놀란 것이죠.
이번 기린 9000s는 중국 최대 파운드리 업체 SMIC가 생산을 맡은 DUV 기반 반도체로 파악됩니다. 앞서 TSMC가 시도한 대로 DUV를 내세워 멀티패터닝 작업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TSMC와 삼성전자를 거친 량멍쑹 SMIC 최고경영자(CEO)가 해당 프로젝트를 주도했다는 후문입니다.
참고로 량멍쑹은 반도체 산업에서 대단한 영향력을 끼친 인물인데요. 그는 TSMC의 기틀을 닦았고 삼성전자에서는 세계 최초 14나노 공정을 완성하는 데 큰 공헌을 하기도 했습니다. 2017년부터 SMIC를 중국 반도체 굴기의 핵심으로 키워나가고 있죠.
SMIC가 7나노 반도체를 만든 건 처음이 아닙니다. 1세대는 비트코인 채굴용 주문형반도체(ASIC)였는데요. 7나노를 구현했다는데 이목을 끌었으나 성능 측면에서 눈에 띄는 성과를 내지 못한 게 사실이었습니다.
테크인사이츠는 이달 초부터 중국의 7나노 반도체 2세대 격인 기린 9000s를 역공학(리버스 엔지니어링) 중입니다. 초기 결과로는 1세대 대비 상당 부분 개선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옥남도 테크인사이츠 한국지사장은 “1세대 제품은 일반 7나노 칩처럼 시스템온칩(SoC) 복잡도가 높지 않았다. TSMC 모델을 참조해서 만들었구나 정도”라면서 “2세대는 진보성이 있다고 판단된다”고 설명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임계 치수(CD) 감소, 셀 면적 10% 축소, 접촉 게이트 피치 등을 이뤄냈다고 합니다. 쉽게 말해서 향상된 멀티패터닝으로 진정한 7나노 반도체에 다가섰다는 의미죠.
다만 DUV를 적용한 것이라면 좀 전에 이야기한 대로 가격경쟁력 등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습니다. 양산화하면 격차는 더욱 커지겠죠. 업계에서는 기린 9000s가 대규모로 생산되기보다는 자체 기술력을 과시하는데 초점을 맞춘 것으로 보는 이유죠. 실제로 대량 생산하고 메이트60프로 탑재하면 화웨이는 수익은커녕 적자에서 벗어나기 힘든 탓입니다.
또 다른 관전 포인트는 설계 측면입니다. 애플, 퀄컴, 삼성전자 등 AP가 그렇듯 화웨이 역시 ARM 아키텍처 기반 AP를 설계하는데요. 기린 9000s도 ARM의 기술이 접목된 것으로 보입니다. ARM 중국법인 ARM차이나는 ARM과 독립적으로 운영되고 있는데요. 이 때문에 지적재산(IP) 이슈에서 다소 자유롭다는 분석입니다.
그럼에도 미국이 기린 9000s를 믿지 못하고 지적하는 지점은 전자설계자동화(EDA) 부분입니다. EDA는 반도체 제조 전 시뮬레이션을 통해 회로 설계 및 오류를 판단하고 해결하는 SW인데요.
앞서 언급한 대로 미국 회사인 케이던스와 시높시스가 시장점유율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어서 이들 IP를 피하기는 불가능에 가깝죠. 따라서 기린 9000s에도 두 회사의 EDA가 쓰였을 것이라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는 것입니다. 2020년 말 케이던스와 시높시스 임직원이 대거 중국에 합류하기도 했는데요. 이같은 흐름이 이어졌을 때 중국산 EDA가 탄생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에 마이클 매콜 미국 하원 외교위원장 등은 “해당 반도체를 중국 SMIC가 개발하는 과정에서 미국 제재 위반 사례가 있었는지 추적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테크인사이츠 리버스 엔지니어링의 구체적인 결과는 이르면 이달 중에 나올 예정입니다. 이를 통해 중국의 반도체 산업이 어디까지 왔는지, 어떤 기술이 중국으로 흘러들어 갔는지 등이 밝혀지게 되겠죠. 이와 별개로 기린 9000s는 중국 반도체 굴기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동시에 미국 견제를 극대화하는 요소가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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