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계적으로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이차전지 등 제조분야의 산업적 가치가 중요해졌고, 그에 따라 소재·부품·장비(소부장)산업에 대한 관심도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하지만 미중 패권경쟁에 따른 아시아 지역의 변화와 유럽연합(EU)의 적극적인 공세로 인해 우리나라는 제품만 생산해 내는 위탁국가로 전락할 우려가 크다. 해외 정세에도 흔들림 없는 K제조업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물밑에서 구슬땀을 흘리는 소부장 강소기업 육성을 통한 경쟁력 제고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소부장 미래포럼>은 <소부장 TF>를 통해 이같은 현실을 직시하고 총체적 시각을 통해 우리나라 소부장의 과거를 살피고 현재를 점검하며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숙제를 되짚어보고자 한다. [편집자주]
[디지털데일리 이건한 기자] ‘후방기업’으로 불리는 소재·부품·장비(소부장) 기업들은 대개 시장의 등락과 전방기업 실적에 큰 영향을 받는다. 구조적으로 이를 타파하기란 쉽지 않다. 다만 이 같은 영향을 최소화하려면 소부장 기업이 스스로 경쟁력 있는 기술을 꾸준히 발굴하고, 변화하는 산업 흐름에 맞춰 선제적으로 매출원 다변화에 나서는 노력이 중요하다. 이 같은 측면에서 동진쎄미켐은 좋은 본보기로 꼽힌다.
반도체 소재 업계에선 유명하지만, 대중에겐 다소 낯선 이름이었던 동진쎄미켐이 본격적으로 알려진 건 2019년 시작된 일본의 수출규제 사태였다. 이는 한국의 일본 의존도가 높았던 반도체 핵심 공정소재(포토레지스트,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불화수소)에 대해 일본 정부가 수출 장벽을 쌓아 업계에 타격을 준 사건이다. 약 4년간 이어진 이 일은 국내 반도체 업계에 위기감과 더불어 소부장 국산화, 독립 필요성에 큰 도전을 남긴 사건이었다.
동진쎄미켐은 그 중 반도체 노광공정의 주요 소재인 포토레지스트(PR, 감광액) 국산화 측면에서 가시적인 성과를 낸 업체로 주목받았다. 포토레지스트는 반도체 원판인 웨이퍼(반도체 기판)에 도포하는 감광액(빛에 반응하는 액체)이다. 고성능 반도체를 제작하려면 웨이퍼에 미세회로를 각인해야 하는데, 이때 반도체 노광장비의 빛에 포토레지스트가 반응하면서 회로가 그려진다.
일본의 수출 규제 이전까지 첨단 반도체용 포토레지스트는 일본의 소수업체가 세계 시장을 독과점하고 있었다. 동진쎄미켐은 이들에 이어 1989년 세계 4번째로 포토레지스트를 개발한 회사다. 수출 규제 이전까지는 포토레지스트 중 주로 파장이 긴 불화크립톤(KrF·248mm)을 3D 낸드플래시용 제품으로 주로 판매했다.
이를 노하우 삼아 수출 규제 사태 이후 동진쎄미켐은 불과 3년만에 불화크립톤보다 파장이 훨씬 짧은 극자외선(13.5mm)용 포토레지스트를 개발하는데 성공한다. 반도체는 회로가 미세할수록 웨이퍼 생산성과 성능 양면이 개선된다. 다만 10nm 미만 초고성능 반도체 공정 수행에는 EUV(극자회선) 노광장비와 이에 대응할 수 있는 EUV 포토레지스트가 필수다. EUV 노광장비는 네덜란드의 ASML이 독점하고 있으며, EUV용 포토레지스트는 수출 규제 당시 일본 기업들의 전유물이었다.
업계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동진쎄미캠의 EUV 포토레지스트는 삼성전자의 반도체 양산라인 일부에 적용되기 시작했다. 이로써 일본 수입 의존도 100%에 금이 생겼다. 당시 제품이 삼성의 신뢰성 시험을 통과한 뒤 1년도 걸리지 않은 시점에 적용된 것으로, 완성도가 상당한 수준이었음을 방증한다.
또한 동진세미켐은 최근 차세대 반도체 노광장비인 ‘하이 NA EUV용 포토레지스트’ 개발도 시작한 것으로 전해진다. 더 이상 일본에 선수를 내주지 않겠단 의지로 풀이된다.
동진쎄미켐은 이 같은 성과를 내기 위해 2020년 김영선 ASML 코리아 대표를 고위 임원인 부회장으로 영입하고 연구개발(R&D)에 전사적인 역량을 집중해왔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에 따르면 회사의 경상개발비도 2020년 41억원, 2021년 47억원, 22년 53억8000만원 등 매년 증가한 것으로 확인된다.
꾸준한 R&D는 동진쎄미캠의 중요한 성장 발판으로 꼽힌다. 1967년 설립 당시 발포제의 첫 국산화를 시작으로 반도체, 디스플레이용 첨단전자 소재와 대체 에너지 소재를 개발·양산해왔다. 2010년엔 대형TV용 절연막을 국내 최초로 개발, 양산에 나섰다.
초기 매출원은 발포제가 주력이었지만 기술 변화에 보폭을 맞춘 선제적 R&D 성과로 지난해 매출에서 가장 높은 비중(52.9%)을 차지한 건 포토레지스트를 포함한 ‘국내전자재료’ 사업이다. TFT LCD 화학제품을 포함한 ‘해외전자재료’ 매출 비중도 37.1%로 적지 않다.
이어 지난해 카본나노튜브(CNT) 도전재 슬러리를 개발해 2차전지(배터리) 시장으로 사업 분야를 확대하고 유럽의 배터리 제조사 노스볼트를 고객사로 확보했다. 배터리용 실리콘 음극재 개발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전세계 전기차 시장이 내연기관차를 대신해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만큼 2차전지 소재 분야에서도 향후 안정적인 수익 창출이 기대되는 상황이다.
이 같은 노력의 결과로 2021년 동진쎄미캠은 연간 기준 처음으로 매출 1조원을 돌파했으며, 지난해에도 1조4500억원을 기록하며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다. 영업이익도 2000억원을 넘어섰다.
한편 동진쎄미켐은 1967년 이부섭 회장이 ‘동진화학공업사’로 창업하고 2018년부터는 차남인 이준혁 부회장이 대표이사로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이 대표는 1967년생으로 서울대 화학공학과 졸업 후 미국 MIT 공과대학 화학공학 박사 과정을 마쳤다. 1994년 동진쎄미켐 입사 후 요직을 거쳐 현재 부회장 자리에 올랐다. 현재 한국디스플레이산업협회 부회장, 한국반도체산업협회 부회장, 한국공업화학회 고문, 한국화학관련학회연합회 이사, 한국공학한림원 이사 등을 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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