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데일리 이안나 기자] 3월8일은 UN에서 선정한 세계 여성의 날이다. 올해로 115주년을 맞았지만 국내 산업계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 성차별이 존재한다. 경제협력개발지구(OECD) ‘유리천장지수’에서 한국이 조사대상 29개국 중 최하위를 기록한 게 대표적이다. 이 기록은 2013년 통계 발표 시작 이후 한 번도 변한 적이 없다.
이커머스 업계엔 두꺼운 유리천장을 깨고 최고경영자(CEO) 자리에 있는 여성 리더들이 있다. 11번가 첫 여성 CEO인 안정은 대표와 2015년 컬리를 창업해 올해 8년차에 접어든 김슬아 대표다. 하나의 조직을 이끄는 책임자로 자리잡기까지 이들이 걸어온 과정은 다르지만 해당 분야에서 뛰어난 역량을 인정받았다는 점은 공통적이다.
안정은 11번가 대표는 지난 1월1일부로 취임하며 하형일 대표와 각자대표 체제를 구축했다. 1975년생인 안 대표는 야후코리아 입사를 시작으로 네이버 서비스기획팀장, 쿠팡 프로덕트 오너(PO)실장, LF e서비스기획본부장을 역임한 이커머스 기획 전문가다. 11번가에는 지난 2018년 신설법인 출범시기 합류해 이후 서비스 총괄 기획과 운영을 담당했다.
업계에서 그는 트렌드·소통 전문가로 정평이 났다. 일에 대해 열정적인 데다 기존 형식들을 과감히 걷어내는 진취적 성향이라는 평이다. 권위적이기보다 직원들 의견수렴에도 적극적인 편이다. 이런 역량을 인정받아 안 대표는 지난해 4월 COO가 된 후 8개월 만에 신임대표로 초고속 승진했다.
안 대표는 취임 후 두달 간 11번가 많은 변화를 일구고 있다. 대표적으로는 아마존 스타일 혁신적인 일하기 방식을 도입해 ‘11번가 2.0’ 도약에 속도 내고 있다. 그는 1월 초 신년사를 통해 아마존 방식 리더십을 강조하며 “중요한 전략과제는 싱글 스레드(Single Thread, ST) 리더십을 통해 목표 중심 프로젝트를 강화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ST 조직은 한 사람(리더)에게 겸임 없이 하나의 목표를 달성하는 일만 전담하는 조직 체계를 말한다. 새로운 리더십 방향성에 기반해 지난 1~2월 ‘상품·카탈로그개선ST’와 ‘다이나믹프라이싱ST’, 그리고 ‘검색·광고개선ST’ 등 3개 조직을 신설했다.
사내 보고 양식을 바꾼 것도 큰 변화다. 개발·서비스 조직 중심으로 기존 PPT 형식을 지양하고, 아마존 글쓰기 방식인 ‘6장 분량 내러티브 메모’를 도입했다. 도표, 이미지, 지나친 요약과 정리 중심 PPT형 보고서 대신, ‘서술’ 메모를 통해 실질적인 내용에 집중할 수 있는 게 강점이다.
구성원 대상 타운홀 미팅에서 안 대표는 “우리의 가장 큰 경쟁력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몰입을 통해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저력”이라고 강조하면서 “치열한 경쟁 속에서도 함께 노력해 목표를 달성해가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변화와 작은 성공들을 구성원들과 즉각 공유하고 격려할 것”이라고 전했다.
컬리 김슬아 대표는 중소벤처기업 업계에서 젊은 CEO들의 롤모델로 꼽힌다. 2020년 코리아스타트업포럼 공동의장과 중소벤처기업부 컴업조직위원회 민간조직위원장으로 선임된 배경이기도 하다.
1983년생인 김 대표는 골드만삭스·맥킨지앤드컴퍼니 등 내로라하던 기업에서 퇴직 후 2015년 컬리(옛 더파머스)를 설립, 약 7년만에 1조원대 매출 성장을 이끌었다. 유통과는 전혀 무관한 이력임에도 불구 디테일한 전략을 빠르게 추진한 결과 컬리는 이커머스 업계 주요 기업으로 안착했다.
특히 컬리는 당일 밤 11시 이전 주문하면 다음날 아침 7시 전 배송을 완료하는 ‘샛별배송’을 시작하며 신선식품 새벽배송 시장 선구자 역할을 했다. 장보기 상품을 새벽배송으로 받게 되면서 코로나19 이후 뉴노멀 시대 삶의 방식을 이어가는 데 기여했다. 그 결과 2015년 30억원이던 매출은 2021년 1조5614억원으로 530배 이상 성장, 회원 수도 1000만명을 돌파했다.
컬리 내 운영되고 있는 ‘상품위원회’를 보면 김 대표 성향을 엿볼 수 있다. 컬 리가 문 연 이래 여전히 진행되고 있는 상품위원회는 입점업체에게 오디션 같은 자리다. 김 대표와 상품기획자(MD)들이 직접 참여해 시식하고 성분, 원산지, 가격을 살펴보며 입점 여부를 결정한다. 상품위원회 참여를 위해 몇 년간 휴가를 가지 않았다는 일화도 유명하다.
지난해 선보인 ‘뷰티컬리’와 식품 브랜드 ‘피카드’가 국내 소비자들에게 서비스되기까지 김 대표가 직접 발품을 팔았다. 뷰티컬리에 글로벌 화장품 브랜드를 입점시키기 위해 김 대표는 직접 수입사에 찾아가 PT를 진행했다. 뷰티컬리 콘셉트와 경쟁력을 알리기 위함이다. 프랑스 국민 식품 브랜드 피카드 단독 출시를 위해서도 프랑스 파리 본사에 방문해 업무 협약식을 진행했다.
동시에 조직 운영에 있어선 수평적이며 일하는 방식은 소탈하다. 김 대표는 평소 청바지에 후드티 차림으로 출근 하고, 별도 대표실이 아닌 임직원들과 섞여 같은 공간에서 일한다. 컬리 직원들은 서로를 직책으로 부르지 않고 영어로 부르거나 이름 뒤에 ‘님’자를 붙여 부른다. 김 대표 역시 내부에선 ‘대표님’이 아닌 ‘소피(Sophie)’로 불린다. 마켓컬리 TV CF에도 직접 출연한 바 있다.
가격은 물론 품질, 기업 추구하는 가치까지 중시하게 된 소비자 수요를 정확히 파악해 친환경 기업으로도 도약하고 있다. 끊임없는 추진력으로 기업을 운영한 김슬아 대표는 2019년 포브스 선정 ‘파워 아시아 여성 기업인’ 25명에 이름을 올렸다. 2021년엔 세계경제포럼(WEF) ‘영 글로벌 리더(YGL)’로도 선정됐다.
역량을 인정받은 안정은 11번가 대표와 김슬아 컬리 대표는 올해 큰 틀에서 비슷한 과제를 안고 있다. 성장률이 둔화한 국내 이커머스 시장에서 차별화된 경쟁력을 만들어 수익성을 개선해야 한다는 점이다. 지난해 상반기까진 이커머스 시장 활황에 힘입어 11번가와 컬리 모두 기업공개(IPO) 추진에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금리인상 등 여파로 투자시장이 얼어붙자 상황이 달라졌다.
올해 초 컬리는 IPO 추진을 무기한 연기했다. 현 시장 상황에선 기대하던 기업가치를 받을 수 없다는 판단에서다. ‘수익성 개선’ 여부가 중요해진 가운데, 2019년 이후 지속적으로 적자 폭이 커진 점이 걸림돌이 됐을 수 있다. 컬리는 지난해 실적을 아직 발표하지 않았으나, 영업손실은 2019년 986억원에서 2021년 2177억원까지 늘었다.
올 하반기 예정된 11번가 IPO 역시 과정을 지켜봐야 하는 상황이다. 현 시장 기조에서 높은 기업가치를 얻기 위해 11번가만의 경쟁력과 수익성 개선이 역시 최대 과제다. 11번가 지난해 영업손실은 1515억원으로 전년(694억원)대비 2배 이상 늘었다. 안 대표는 지난 달 진행한 타운홀 미팅에서 “올해를 11번가 반등을 이뤄내는 원년으로 삼고 성장과 수익성 개선에 집중하겠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