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데일리 김문기 기자] 미국이 ‘국가안보'를 명목으로 전세계 반도체 시장을 삼키기 위한 반도체지원법(칩스법) 시행을 본격화한 가운데, 그에 따른 출구전략 마련이 시급하다.
미국 정부가 공개한 반도체 생산지원금 기금지원공고에 따르면 조단위 보조금 수혜를 받을 수 있지만 독소조항들이 대거 포함돼 있어 반도체 기술 유출 우려와 미 정부의 개입 여부, 중국 반도체 생산 능력 감소 등을 감내해야 하기 때문. 이에 따라 안보 우려 국가인 중국 공장의 의존도를 낮춤과 동시에 생산기지 다변화 등의 대안 마련이 요구된다.
아울러, 무엇보다 전세계 기술패권 경쟁 속에서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는 내실도 굳건히 다져야 한다. 하지만 국내 반도체 생산 지원을 목적으로 하는 ‘K칩스법(조세특례제한법)’이 국회 정쟁으로 인해 이달 통과도 어려운 상황이다. 다행히 정부와 여당 등이 3월 임시국회를 통해 반드시 통과시켜야 한다는 입장이어서 야당과 합의가 원활하게 이뤄진다면 최소한의 바람막이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3일 산업통상자원부는 수출위기 극복을 위한 전략을 논의하기 위해 ‘수출전략 민·당·정 협의회’에 참석했다. 이번 협의회에는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 성일종 국민의힘 정책위의장뿐만 아니라 송언석·한무경·이용호·양금희·김미애 의원(국민의힘)이 자리했다. 정부부처에서는 이창양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업계는 SK하이닉스와 산업은행 회장 등이 반도체 시장을 대변했다.
협의회에서는 우리나라의 수출 감소와 무역수지 적자가 계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글로벌 경기둔화와 반도체 업황 악화도 지속될 것으로 전망되는 등 매우 엄중한 상황이라는데 인식을 같이 했다. 최근 직면한 수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정부, 국회, 기업 모두의 역량을 결집하고 협력해 나가야 한다는데 공감대를 형성했다.
특히, 우리 수출에서 20%에 가까운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나, 큰 폭의 수출 감소가 이어지고 있는 반도체의 수출 및 투자 확대를 위한 방안을 집중적으로 논의했다. 국내 반도체 월 수출증감율을 살펴보면 지난해 11월 29.9%, 12월 29.1%에 이어 올해 1월 44.5%, 2월 42.5%나 감소한 상태다.
앞서 이창양 장관은 지난 2월 23일 윤석열 대통령 주재 제4차 수출전략회의에서 올해 수출목표를 지난해 보다 증가한 6850억달러로 설정하고, 윤석열 대통령이 강조한 ‘전부처의 산업부화’기조 하에 수출 플러스를 반드시 달성하기 위해 모든 역량을 결집해 나갈 계획임을 밝히기도 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이 장관은 국가전략기술 투자에 대한 세액공제 상향과 임시투자세액공제 도입을 내용으로 하는 조세특례제한법 개정과 관련해 초격차 기술력 유지를 위한 기업의 투자가 실기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는 만큼 조례특례제한법 개정안이 신속하게 의결될 수 있도록 협조를 요청했다.
아울러, 중요성이 더해가고 있는 반도체 후공정 분야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올해 첨단패키징 기술개발 예비타당성조사 사업 추진, 5300억원 규모의 정책 금융 등을 적극 지원한다는 계획이다.
◆ 국내 생산능력 배양 필요…깨우지 못한 ‘K칩스법’
산업부는 최근 미국의 반도체산업 투자 지원, 반도체 장비 수출규제 등과 관련해 우리의 입장이 충분히 반영될 수 있도록 미국과 협의에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
지난해 8월 미국서 발표된 칩스법은 총 527억달러 규모다. 지난 2월 28일 시설투자와 관련된 보조금 390억달러(한화 약 51조7000억원)에 대한 공고가 발표됐다. 미국 내 반도체 제조시설 투자를 추진하는 기업의 경우 미국 정부로부터 보조금, 대출 또는 대출 보증 등의 방식으로 보조금 수혜를 입을 수 있다.
하지만 예상 현금 흐름 등의 재무재표와 초과이익공유, 반도체 생산시설 접근권, 미국산 재료를 활용한 생산설비 구축, 근로자를 위한 보육시설 마련 등의 복지 혜택, 보안 우려 국가에 대해 10년간 투자 및 첨단화 제한 등의 조건이 부과됐다. 중국에서 전체 반도체 중 40~50%를 생산하고 있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경우 직접적인 피해가 예상될 뿐만 아니라 기술유출 우려까지 감당해야 한다.
산업부는 이와 관련해 “정부는 미국 반도체지원법의 가드레일 조항 등 반도체 통상 이슈 해결을 위해 적극적이고 주도적으로 논의해 왔다”라며, “업계와의 긴밀한 소통을 거쳐 우리측 입장을 마련, 이의 반영을 위해 미국 관계당국과 화상회의, 방미 면담 등 긴밀히 지속적으로 협의하고 있는 중”이라고 밝혔다.
지난 2월 15일부터 17일까지 산업부 1차관이 직접 미국을 방문해 상무부‧백악관 고위관계자 등에게 주요 반도체 통상현안과 관련한 우리나라의 입장을 개진하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일개 기업이 미국 정부와 원만한 협상이 어렵다는 점을 감안해 우리나라 정부가 직접 이를 해결하기 위해 나서야 한다는 주장과 함께 첨단 제품의 국내 생산 내실화 역시 강화해야 한다는 분석이다. 중국뿐만 아니라 미국과 우호적인 제3국으로의 생산기지 다변화가 요구되지만 그보다 먼저 국내 생산능력을 배양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에 대응할 수 있는 대안으로 정부가 올해 제출한 조세특례제한법 일부개정법률안이 꼽힌다. 일명 K칩스법으로 불린다. 정부가 제출한 법안은 반도체 시설 투자에 대한 기본 공제율을 대기업 15%, 중소기업 25%로 상향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기존 대기업은 8%, 중소기업은 16% 수준이다.
다만, 지난 2월 16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가 조세소위 및 여야 간사합 협의를 통해 논의하기는 했으나 결론에 도달하지 못했다. 더욱이 이달 임시국회가 열릴 예정이나 관련한 상임위 회의 일정조차 잡히지 않고 있다.
국회 관계자는 “반도체 지원법은 초당적 협력이 이뤄져야 한다는데 큰 이견은 없다”라며, “하지만 최근의 여야 강대강 구도 속에서 상임위가 제구실을 해줄 수 있는지는 지켜봐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최근 대한상공회의소가 전문가에게 의뢰해 분석한 ‘투자세액공제의 기업투자 유인효과와 방안’ 보고서에 따르면 반도체, 이차전지, 바이오, 디스플레이 산업 등이 포함된 국가전략산업의 경우 다른 외부적 요인이 동일할 때 세액공제율이 1%p 확대되면 설비투자는 대·중견기업은 8.4%, 중소기업은 4.2%로 늘어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상의는 분석된 결과를 정부가 제출한 조특법 개정안에 대입할 경우 전략산업 분야 설비투자액이 대·중견기업은 59%, 중소기업은 38%까지 증가할 수 있다고 밝혔다.
다만 이같은 분석은 기업투자에 영향을 미치는 다른 외부적 요인들은 배제한 결과로 경기동향, 조달금리 등 제반 요인까지 고려할 경우 실제 수치는 달라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강석구 대한상의 조사본부장은 “올해 반도체 설비투자가 감소하면 단기적으로 역성장이 우려되고, 장기적으로는 반도체 경쟁에도 악영향이 우려된다”며 “적어도 경쟁국과 동일한 수준의 세제지원을 통해 기업들의 투자심리를 되살려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