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모바일이 꿈꾸는 따뜻한 휴머니즘
그들은 가난한 신혼 부부였다. 실직한 남편은 집안에 있고, 아내가 회사에 나갔다. 어느 날 아침, 쌀이 떨어져서 아내는 아침을 굶고 출근을 했다.
점심 시간에 아내가 집에 돌아와 보니, 남편은 보이지 않고, 방 안에는 신문지로 덮인 밥상이 놓여 있었다. 따뜻한 밥 한 그릇과 간장 한 종지. 아내는 상 위에 놓인 쪽지를 보았다.
"왕후(王侯)의 밥, 걸인(乞人)의 찬……. 이걸로 우선 시장기만 속여두오."
낯익은 남편의 글씨, 아내는 눈물이 핑 돌았다. 왕후가 된 것보다도 행복했다.
-김소운의 수필<가난한 날의 행복>중에서-
기억이 가물 가물할 정도로 오래됐지만 꽤나 인상이 깊었던 수필이다.만약 수필속의 아내가 요즘 사람이라고 치고 ‘왕후의 밥, 걸인의 찬’이란 내용을 문자메시지로 받았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아내는 ‘고마워♥’라며 즉시 답장을 보내지 않았을까.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문자 씹었다’고 남편이 서운하게 생각할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너무 경박한 반응인가.
사회학자들은 휴대전화 사용자가 크게 늘어나면서 우리 사회의 커뮤니케이션 문화가 급속하게 변화하고 있다는 점에 동의한다. 특히 문자를 통한 소통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결과이다.
새로운 소통, 문자(文字)의 전성시대
국내 이동통신사업자들이 올리는 데이터매출은 약 3~4조원에 달한다. 특히 데이터매출 가운데 SMS(단문메시지)가 약 50%에 육박한다.
'통화'버튼만 누르면 바로 연결되는데 왜 빠르지도, 정확한 뉘앙스를 전달하지도 않은 문자메시지에 사용자들은 더 열광할까. 엄지족(族)의 탄생은 어쩌면 '스피드의 역설'이다.
여러가지 분석이 가능하지만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문자가 주는 엔터테인먼트적 요소가 단순히 통화의 그것을 능가하고, 한편으론 문자가 주는 의미의 전달력이 역설적으로 영상보다 더 강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즉, 소통의 영향력측면에서 문자메시지가 예상보다 강력하고, 그것은 또 다른 소통의 문화로 인식해야 한다는 것.
통신업계와 여러 조사기관의 분석을 종합해보면 거의 공통적으로, 연령별로 30~40대는 주로 업무중심으로, 20대는 통화의 대체 또는 보완수단 정도로 문자메시지를 사용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렇다면 '문자세대'로 규정되는 10대 청소년들은 무슨 내용을 문자로 주고 받을까.
서울 강북구에 소재한 A고교의 김모 교사(여.40)는 "수업중에 친구끼리 문자메시지를 보내다 들키는 학생들이 많다. 하지만 문자메시지 내용은 '이런것까지 문자로 보내나'싶을 정도로 아무런 의미없는 내용들이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심지어 선생님이 수업하는 도중에 나타나는 사소한 몸동작까지 하나 하나 실황중계하듯 문자로 보내기도 합니다. 문자 그 자체가 거의 무의식적인 소통이죠."
그는 "처음에는 기성세대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었지만 한편으론 그들만의 소통방식을 인정해주는 것이 세대간의 소통을 오히려 원할하게 하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선생님 조퇴하면 안되요?'
실제로 김 교사는 교무실에 찾아오지도 않고 학생들이 핸드폰 문자메시지로 조퇴를해달라고 졸랐을때 무척 당황했다고 한다. 건방지고 예의없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김교사는 문자로 친절하게 답장을 해주었다고 한다.
이제는 반 아이들이 문자메시지로 진지하게 고민상담을 할 정도로 가까워졌다. 문자가 들어오는 족족 답장을 해주는 손놀림도 무척 빨랐다.
김교사는 "초등학생때부터 경쟁에 시달리고 입시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요즘 아이들이 선생님한테 문자로 답장을 받으면서 '관심'을 받는다는 것을 느끼고, 따뜻함을 느낀다는 것에 의외로 놀랐다"고 말했다.
김교사는 자신도 언제부터인가 아이들에게는 말로 할것도 문자로 표현한다고 한다.
휴대폰을 통한 '새로운 소통'의 방식에 대해 일각에서는 기대와 우려가 교차하고 있다. 물론 긍정적인 기대가 높다.
무한대의 ‘모바일 네트워크’로 엮여지는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의 생산성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이 휴대전화외에는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기때문이다. 즉, 모바일의 생산성, 경제성, 확장성을 중시한 시각이다.
반면 부정적인 견해도 결코 지나칠 수는 없다. 한 사회 학자는 “신속하게 의사를 표현하는 커뮤니케이션의 '즉시성(卽時性)'은 강화되고 있는 반면 깊이 있는 ‘사유’(思惟)의 여백은 줄어들고 있다”고 지적한다.
예전에 SK텔레콤이 때와 장소에 따라 ‘휴대전화를 꺼두셔도 좋습니다’라는 광고 카피를 선보인 적이 있다.
역설적이지만 커뮤니케이션 도구로서의 휴대전화를 인정하더라도 결국 인간관계의 진정한 가치는 ‘소통’(疏通)이 그 중심에 서야 한다는 메시지이다. 그것이 곧 ‘휴머니즘’(Humanism)이다.
신속한 커뮤니케이션 도구로서 휴대전화의 엄청난 경제성을 인정하되, 휴대전화를 중심으로 새롭게 창출되고 있는 커뮤니케이션 문화의 ‘경박성’을 질책하고 경계하는 것이다.
과학과 휴대폰, 휴머니즘
과거 ‘통화’(通話)의 수단에서 출발한 휴대전화는 더 이상 그 본래의 목적성외에 자신을 표현하는 ‘감성’의 전달 수단으로서 더 가치를 발하고 있다. 또한 강력한 네트워크와 정보전달 수단으로써의 휴대전화는 사회적 공동체적 공기(公器)로서의 역할도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다.
지난 2004년 5월, SK텔레콤은 경찰청에 휴대전화의 무선인터넷망을 활용해 실종 아동, 정신지체장애인, 치매노인 등을 찾아나서자고 제안했다.
이것이 바로 국내에 처음 시도됐던 '휴대폰 미아찾기'의 시작이다.이후 통신사업자들의 사회공헌 활동으로 자리잡았다. 어린이의 사진과 인상착의 등을 이동통신 가입자들에게 보내는 방식인데,이를 통해 현재까지 약 40여명의 어린이들이 집으로 돌아갔다.
최근 SK텔레콤은 사회공헌 서비스의 하나로 <희망의 문자나눔> 캠페인에 나섰다. 우리 주변의 어려운 이들을 돌아보고 희망을 함께 나누자는 취지에서 시작했다. 이를 통해 전신화상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한 여성에게 큰 도움이 됐다.
익숙한 휴대폰 문자보내기를 통해 언제 어디서나 참여할 수 있으며 어려움에 처한 당사자들에게 응원 문자를 보내고 1000원의 후원금을 동시에 전달할 수 있다.
한편 GPS(위치추적시스템)이 탑재된'키드폰', 노인들이 조작이 용이하고 긴급상황이 신속한 상황대체가 될 수 있도록 한 '실버폰' 등 연령대를 중심으로 한 특화된 휴대전화 서비스도 앞으로 더 세분화된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다.
당초 인간을 세상의 중심에 놓는‘휴머니즘’은 지난 15~16세기 이탈리아에서 출발해 유럽 전역에서 신학중심의 학문체계에 반대해 일어난 사조이다.
특히 휴머니즘은 17세기 근대과학의 '합리적 정신'과 결합됨으로써 강력한 가치로 완성됐고 18세기 산업혁명을 거쳐 20세기 과학문명을 이끌었다.
하지만 어느 샌가 '과학'이 인간을 지배하는 세상이 됐고, 과학과 결합한 자본주의의 발달은 결국 '인간성 상실'의 문제로까지 이어지면서 휴머니즘은 위기를 맞는다.
그런 점에서 인류 과학문명의 '최신 결정판'이라 할 수 있는 휴대폰에 '휴머니즘'을 연결시키는 것은 억지스럽고 지극히 부자연스러울지 모른다.
하지만 휴대폰은 이미 '소통'의 도구에 머무르지 않고 '소통'그 자체가 되고 있다. 인간과 인간을 연결하는 매개체로써 보다 의미있는 사회문화적 의미를 부여할때가 된 것이다.
한편으로 혹자는 휴대폰을 '반문명적 도구'라고 혹평한다. 휴대폰이 때론 몰카의 도구가 됐고, 컨닝의 도구로도 전락한 적이 있으며, 전화번호와 같은 개인정보가 유출됐을때 얼마든지 범죄에 악용될 수 있기때문이다. 더구나 편리성에만 비중을 둔 나머지 '인간 단절'의 도구로 작용할 수 있다는 우려도 적지 않다. 문명성의 후퇴라는 것이다.
휴대폰은 편리해지고자 하는 인간 과학문명의 결정체인 것만은 분명하다. 객관적으로 보면 냉정하고 차갑다.
그래서 휴대폰에 '따뜻한 휴머니티'를 넣으려는 노력은 사회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휴머니즘'을 강조하는 것이 단순히 이동통신서비스 사업자의 캠페인에 머물 수 없는 이유다.
인류는 빠르게 이동하기 위해 자동차를 만들었지만 누구도 '속도'를 주문하지 않는다.
이제 갓 20년이 된 휴대전화서비스도 단순히 통화적 수단으로서의 편리성만을 강조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더 자주 직접 만나고 느끼도록 권유한다. 휴대폰을 꺼두어도 괜찮은 상황이면 꺼야할 것 같다.
<기획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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