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데일리 문대찬기자] 지난 25일 열린 제 142차 IOC(국제올림픽위원회) 총회에선 ‘올림픽 e스포츠 대회’ 창설이 집행위원들의 만장일치로 결정됐다. 이는 이스포츠를 넘어 게임 역사상으로도 의미 있는 사건이다. 단순한 놀이로만 치부됐던 게임이 전 세계인이 즐기는 문화 스포츠로 인정받은 것이라서다.
반면 한국의 분위기는 조금 다른 듯하다. 나라를 대표해 태극마크를 달고 뛸 프로게이머들을 잠재적 환자로 만드는 작업이 은밀하게, 또 노골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WHO(세계보건기구)는 2019년 국제질병분류(ICD-11) 리스트에 게임이용장애라는 명칭의 질병코드를 등재했다. 쉽게 말해 게임 중독을 인정하고, 치료해야 할 질병으로 본다는 얘기다.
우려스러운 점은 한국표준질병사인분류체계(KCD)가 그간 국제 기준인 ICD를 준용해 작성되었기 때문에, 현행 통계법에 따르면 코드 국내 도입이 시간 문제라는 것이다. KCD는 2025년 개정 예정인데, 이 때 질병코드가 도입되면 2031년부터는 게임이 중독 물질로 취급된다.
이 가운데 보건복지부와 국내 정신의학계는 게임이용장애 진단척도 개발 협의에 착수하는 등 적극적인 질병코드 도입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한 정신과 의사는 공영방송에 출연해 살인 사건 원인으로 게임을 지목하면서 게임 혐오를 부추기고, 어느 교수는 WHO의 진단 가이드라인이라고 할 수 있는 CDDR 발간에 자문까지 하면서 질병코드 도입에 앞장서고 있다.
반면, 도입을 반대하는 문화체육관광부는 WHO에 명확한 의견을 제시하지 않는 등 상대적으로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 게임업계의 위기감을 증폭시키고 있다.
질병코드 도입은 프로게이머뿐 아니라 일반 게임 이용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ICD에 따르면 게임이용장애는 크게 ‘게임 통제력 상실’, ‘게임 우선’, ‘부정적 결과에도 지속·확대’ 등의 증상이 1년 이상 지속될 경우로 정의된다.
다른 일상 생활을 포기하면서 게임 시간을 늘리는 것을 중독으로 간주한다는 것인데, 이는 평소 게임을 즐기는 일반적인 이용자들의 모습과 차이가 크지 않다.
ICD-11대로라면 종종 지속된 연패에도 불구하고 운동 등 외부 활동을 제쳐두고 새벽까지 ‘리그오브레전드’를 플레이하는 기자도 ‘위험 인자’를 갖춘 잠재적 중독자인 셈이다.
이러한 기준에 따르면 스마트폰이나 유튜브 중독에 대한 우려도 제기될 법하지만, 의아하게도 이러한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다. 국내 1인당 유튜브 월평균 사용 시간이 40시간으로 2019년 대비 2.2배 증가했음에도 불구하고, 유튜브를 중독 물질로 규정하거나 중독 위험성을 공론화하려는 목소리는 거의 없다. 하물며 총질과 칼질이 난무해 폭력을 조장할 위험이 있는 영화를 규제하고자 하는 움직임도 없다.
심지어 해당 기준들은 국내외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릴 정도로 기준이 불명확하다는 치명적인 약점을 갖고 있다. 관련 연구 품질이 낮은 데다, 진단을 위한 구성체계 작업 과정이 약물이나 도박 중독에 의존함에 따라 게임 특수성이 없다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게임 과몰입이 정신적 질병의 종류가 아니라, 우울증 등 다른 정신적 증상에서 발현된 결과일 뿐이라는 시각도 있다.
게임 이용자의 문화 향유권을 박탈해 헌법상 기본권 제한 문제로 비화할 수 있다는 우려는 차치하고서라도, 게임 질병 코드 도입은 사회 시스템 곳곳에서 상당한 출혈을 야기할 수 있다.
작년 국내 게임산업 수출액은 83억450만 달러로, 전체 콘텐츠 산업 수출액(129억6300만달러)의 64.1%를 차지한다. K팝(8.1%), K드라마·예능(6.4%)의 10배 수준이다. 하지만 국무조정실 주관 민관협의체가 2019년 실시한 연구용역에 따르면 질병코드를 도입할 경우 게임산업(20조원 가정)에서 총 8조원 이상 피해가 예상된다. 제 살 깎아먹기다.
여기에 담배·주류와 같은 각종 부담금 문제가 발생하는 것과 더불어, 불명확한 기준 속 무분별한 중독 치료가 행해지면서 국가 재정이 불필요하게 소모될 가능성도 높다.
게임을 중독 물질화하려는 작금의 사태가 더욱이 안타까운 것은 우리 사회가 프로게이머를 게임 중독자로 낙인찍던 20여년 전의 인식 수준에 머물러 있어서다.
‘이스포츠의 아버지’로 통하는 전 프로게이머 임요환은 지난 2003년 방송 프로그램 ‘아침마당’에 출연했다가 갖은 수모를 겪었다. 당시 사회자는 임요환에게 “오프라인에서도 사람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드냐” 등 편견으로 가득한 질문을 던져 게이머 분통을 자아낸 바 있다.
게임이 문화예술 범주에 포함되고 이스포츠가 아시안게임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현재도, 한국에선 변함없이 게임 이용자들에게 당시와 같은 사회적 폭력이 행해지고 있는 것이다.
반가운 것은 게임을 지키려는 정치권 일각의 움직임이다. 지난 4일 조승래 의원 등 일부 국회의원은 ‘게임정책포럼’을 열고 게임 이용장애를 포함한 현안을 점검하는 세미나를 열었다. 아울러 더불어민주당 강유정 의원은 질병코드 등재를 막기 위한 통계법 개정안 추진에 나섰다. 조 의원은 현행 청소년 보호법상에서 ‘게임 중독’ 표현을 삭제하는 개정안을 발의했다.
WHO의 ICD에는 강제성이 없다. 충분히 연구하고 논의한 뒤, 우리 사회 실정에 맞게 주체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 부디 정부가 편견에서 비롯된 성급한 판단으로 게임산업과 문화를 훼손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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