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데일리 김도현 기자] 반도체 세계 대전이 한창인 가운데 우리나라는 기술 유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이 어렵게 확보한 노하우가 해외로 넘어가는 탓이다. 국내에서는 처벌 수위가 낮아 ‘한탕족’을 지속 양산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22일 국가정보원에 따르면 2017년부터 2022년까지 적발된 산업기술 유출 사건은 110건이 넘는다. 이 기간 해당 범죄에 따른 피해예상액(대검찰청 추산)은 26조원을 상회한다.
최근 삼성전자 자회사 세메스 사태가 대표적이다. 세메스는 반도체 및 디스플레이 설비 회사로 세계 최초 ‘초임계 반도체 세정 장비’를 개발했다. 약액 등으로 반도체 웨이퍼를 세척하고 초임계(임계 이상 고온·고압 물질) 상태 이산화탄소를 이용해 웨이퍼를 건조하는 역할을 한다.
해당 제품은 산업통상자원부가 국가핵심기술로 지정할 정도로 중요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세메스 외에 일본 도쿄일렉트론(TEL)만 생산할 수 있을 만큼 고난도이기도 하다.
수원지방검찰청 방위사업·산업기술범죄수사부는 지난 16일 세메스 전 직원 A씨와 B씨, 기술 유출 브로커 중국인 C씨, 세메스 협력사 대표 D씨 등 4명을 구속기소 했다고 밝혔다. A씨는 초임계 관련 장비 도면을 D씨로부터 취득해 C씨를 통해 중국으로 유포한 혐의를 받는다. A씨 등은 세메스에서 유출한 정보로 만든 습식 세정기 등을 수출해 1193억원 정도 이득을 취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번 사건을 통해 삼성전자 메모리 및 파운드리 공정별 약액 사양 등도 유출된 것으로 파악된다. 중국으로서는 글로벌 기업의 반도체 기술을 손쉽게 얻은 것이다.
앞서 A씨와 D씨 등은 지난해 5월 산업기술보호법위반 혐의 등으로 구속기소 된 바 있다. 같은 해 7월 이들은 1심에서 징역 1년6개월형을 받았다. 4개월 뒤인 11월 법원 보석 결정으로 석방됐다가 추가 혐의가 나타나면서 다시 구속영장 청구 및 발부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솜방망이 처벌 논란이 제기됐는데 그마저도 이행되지 않은 것이다.
반도체 장비업체 관계자는 “기술의 중요성이나 취한 이익을 고려하면 1년 반은 너무 짧다. 이 수준이면 2심, 3심으로 가서 집행유예나 벌금형으로 끝날 가능성이 큰 것으로 안다”며 “이러한 사례를 지켜본 일부 종사자들이 ‘중국 등에 기술 넘겨 많은 돈 벌고 1~2년만 버티면 되는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라고 토로했다.
작년 10월에는 반도체 기술 자료를 빼돌린 삼성전자, 삼성엔지니어링 등 전·현직 연구원과 협력사 임직원 10명이 기소된 바 있다.
서울중앙지검 정보기술범죄수사부에 따르면 삼성전자 파운드리 사업부 소속 연구원 E씨는 미국 인텔에 이직하기 위해 전자회로 시뮬레이션 모델링 자료 등을 촬영한 유출한 혐의를 받는다. 삼성엔지니어링 연구원 F씨는 반도체 초순수 시스템 운전 매뉴얼, 설계 도면 등을 들고 중국 회사로 옮겼다. 이후 이들 중 일부는 집행유예 또는 벌금형 판결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외에도 반도체, 디스플레이, 2차전지 등 국내 기업이 선두권에 있는 분야에서의 기술과 인재 유출은 끊이지 않고 있다. 문제는 사태의 심각성에도 가벼운 처벌에 그치고 있는 부분이다. 더욱이 첨단기술은 한번 빠져나가면 피해를 가늠하기 어렵고 사실상 회복이 불가능하다.
현재 산업기술유출방지법에 따르면 국가핵심기술을 외국에서 사용하거나 사용되게 할 목적으로 유출한 자는 3년 이상 징역과 15억원 이하 벌금을 병과한다. 산업기술은 15년 이하 징역 또는 15억원 이하 벌금이다. 하지만 해당 목적을 입증하기는 쉽지 않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결과적으로 처벌 수위가 낮아지게 되는 셈이다.
작년 8월부터 시행 중인 국가첨단전략산업 특별법에 해외 기업 이직 제한, 비밀 유출 방지 등 내용이 들어가기는 했으나 경쟁국 대비 처벌 강도가 여전히 약하다는 평가다.
반면 대만은 2022년 초 기술 유출이 적발되면 간첩죄를 적용해 최대 12년 징역형과 1억대만달러(약 44억원) 벌금을 물린다는 내용의 국가보안법을 통과시켰다. 미국은 국가전략기술을 해외로 유출한 사실이 적잘되면 간첩죄로 판단해 국외 추방 등을 부과한다. 일본은 ‘경제안전보장추진법’을 제정해 막대한 액수를 손해배상 청구하고 있다.
한 반도체 소재사 대표는 “강력한 방지 대책이 필요하다고 본다. 본보기만 될 만한 사례가 있어야 또 다른 유출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정부는 계속되는 핵심기술 유출을 방지하기 위해 특허관리 체계 구축을 국가핵심기술에서 방위산업 기술로 확대하고 경제 안보상 중요한 발명에 대해 필요 시 비밀특허제도 적용 대상을 선진국 수준으로 확대하는 방안을 검토하기로 했다.
특허청은 기술범죄수사 지원센터를 신설해 기술 경찰의 수사 역량을 강화하고 검찰청과 미국 국토안보수사국과 공조 체계를 마련할 방침이다. 또한 지난해 확보한 30명의 반도체 부문 전문심사관을 오는 3월 조기 투입해 전담 심사조직을 선제적으로 꾸려 국내 기업을 지원할 계획이다.
이인실 특허청장은 “세계적 패권 경쟁과 당면한 복합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핵심동력이 지식재산”이라며 “이를 기반으로 미래 기술을 선도하고 우리 기업이 세계적 혁신기업으로 도약할 수 있도록 뒷받침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