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데이(D-Day). 사전적 의미는 중요한 작전이나 변화가 예정된 날입니다. 군사 공격 개시일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엄청난 변화를 촉발하는 날. 바로 디데이입니다. <디지털데일리>는 정보통신기술(ICT) 시장에 나름 의미 있는 변화의 화두를 던졌던 역사적 디데이를 기록해 보고자 합니다. 그날의 사건이 ICT 시장에 어떠한 의미를 던졌고, 그리고 그 여파가 현재에 어떤 의미로 남았는지를 짚어봅니다. <편집자 주>
[디지털데일리 권하영 기자]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홍상수 감독의 2015년 작품입니다. 독특한 제목 덕에 여기저기 많이 패러디 되기도 했죠. 2019년 말 유료방송시장에서 일어난 한 인수합병(M&A) 사례에도 이 제목을 들어볼까 합니다. 바로 LG유플러스가 CJ헬로(현 LG헬로비전)를 인수한 때인데요.
LG유플러스는 2019년 2월 CJ ENM으로부터 CJ헬로 주식을 인수하는 계약을 체결했고, 그해 3월 이에 대한 승인을 정부에 신청했습니다. 이어 11월 공정거래위원회(이하 공정위)가 기업결합 승인을 발표했고, 12월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이하 과기정통부)가 CJ헬로 최다액출자자 변경 승인 등을 결정하며 주요 절차가 마무리됐습니다.
당시 시장에선 정부의 이 같은 판단에 많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사실 CJ헬로를 탐낸 것은 LG유플러스만이 아니었거든요. 이보다 3년 전인 2016년 SK텔레콤은 자회사 SK브로드밴드를 통해 당시 CJ헬로비전 인수를 추진했었습니다. 하지만 공정위 심사에서 ‘불허’ 판정을 받으며 고배를 마시고 말았죠. 미래창조과학부(현 과기정통부) 인가와 방송통신위원회(이하 방통위) 사전동의 절차는 시작도 못했습니다.
공정위가 밝힌 불허 사유는 유료방송시장 독과점 가능성이었습니다. 공정위는 유료방송시장을 전국 단위로 보지 않고, CJ헬로비전이 케이블방송 사업을 펼치던 23개 방송 권역을 각각 단일한 시장으로 봤습니다. 그중 21개 권역에서 SK브로드밴드 IPTV와 CJ헬로비전 케이블TV 합산 점유율이 최대 76%가 될 것으로 계산한 것입니다. 2위 사업자와의 격차가 상당히 벌어질 것으로 본 것이죠.
같은 잣대를 적용했다면 LG유플러스도 CJ헬로를 인수하지 못했을 겁니다. 상당수 CJ헬로 방송 권역이 LG유플러스 IPTV와 결합 시 점유율 과반을 넘어서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죠. 그런데 그 사이 정부 기조가 조금씩 바뀌게 됩니다. 케이블TV보다 IPTV의 영향력이 커졌고,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등 신규 미디어가 등장하면서, 정부 역시 방송·통신 융합 경쟁력을 보다 긍정적으로 들여다보기 시작했습니다.
또 과거 케이블TV 가입자가 더 많을 때는 이동통신 1위 사업자인 SK텔레콤이 케이블TV 시장 1위 CJ헬로를 인수하면 지배력이 편중될 우려가 있다는 논리가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IPTV 시장이 커지면서 1위 사업자는 KT가 됐고, LG유플러스는 이동통신에서나 IPTV에서나 지배적 사업자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LG유플러스의 CJ헬로 인수가 미디어 시장의 경쟁을 촉진할 것이란 판단에 이르게 됩니다.
물론 LG유플러스의 인수 과정도 마냥 순탄치는 않았습니다. SK텔레콤을 비롯한 경쟁사들의 견제도 한몫했지만, 특히 CJ헬로의 알뜰폰 사업도 관건이었습니다. 이동통신사업자가 알뜰폰 1위 사업자를 인수하면 알뜰폰 시장 경쟁이 위축될 것이란 염려가 온 것이죠. 공정위가 과거 SK텔레콤의 인수를 반대하면서 CJ헬로비전이 알뜰폰 시장에서 갖는 ‘독행기업’으로서의 지위를 강조한 점도 부각됐습니다.
독행기업이란 가격 경쟁과 시장 혁신을 주도하는 사업자를 뜻하는데, 당시 CJ헬로는 비(非)통신사이자 알뜰폰 시장 1위 업체로서 통신사들과 도매대가 협상을 주도하는 등 알뜰폰 업계 ‘맏형’ 역할을 도맡았습니다. 이런 기업이 통신사인 LG유플러스에 넘어가게 되면 시장 경쟁을 제한할 것이란 우려가 나온 겁니다. SK텔레콤의 CJ헬로비전 인수를 반대한 공정위가 든 이유 중 하나도 이 ‘독행기업성’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정부는 LG유플러스의 손을 들어주게 됩니다. 공정위는 “CJ헬로를 ‘독행기업’으로 볼 수 없다”며 “LG유플러스가 CJ헬로 알뜰폰을 인수하더라도 시장 경쟁을 제한할 우려가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당시 CJ헬로는 가입자 수와 점유율이 점차 감소하는 추세였고, 알뜰폰 시장 자체가 침체된 상황이었습니다. 3위 사업자인 LG유플러스가 인수하면 오히려 경쟁이 활성화될 것이라 본 것입니다.
대신 과기정통부는 LG유플러스에 인수 조건을 내걸었습니다. 주요 5G·LTE 요금제를 알뜰폰 사업자들에 저렴하게 도매하도록 했고, LG유플러스 결합상품 할인혜택 등을 동등하게 제공하도록 했습니다. 방송 분야에서도 콘텐츠 투자 계획을 비롯해 다른 케이블TV 사업자와의 상생 방안을 내놓을 것을 요구했습니다. LG유플러스는 당시 5년간 2조6723억원, CJ헬로는 1조1239억원을 콘텐츠에 투자하기로 합니다.
LG유플러스의 CJ헬로 인수는 IPTV의 케이블TV 흡수라는 유료방송시장의 추세가 본격화된 사건이기도 합니다. 이후 SK브로드밴드는 티브로드와 합병했고, KT는 현대HCN(현 HCN)을 인수했습니다. 이제 남은 MSO(복수 종합유선방송사업자)는 딜라이브와 CMB뿐, 이들 또한 매각을 준비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IPTV 3사의 M&A가 마무리된 시점에서 이들의 매각이 난관에 부딪힌 점은 논외로 하겠습니다.
어쨌든 CJ헬로는 2019년 12월24일자로 주주총회를 열어 ‘LG헬로비전’이라는 새 이름을 갖게 됩니다. ‘헬로비전’은 ‘CJ헬로’ 이전 9년간 사용했던 사명이었습니다. ‘비전(vision)’은 텔레비전을 상징하는데, 케이블TV 사업자로서의 정체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인수가 마무리된 후 CJ헬로의 새로운 대표는 당시 송구영 LG유플러스 홈미디어부문장이 맡았습니다.
새 출발 2년째. LG헬로비전은 글로벌 OTT ‘디즈니플러스’와의 제휴, 자체 키즈 플랫폼인 ‘아이들나라’ 등 모회사 LG유플러스와의 시너지를 톡톡히 내고 있습니다. LG헬로비전의 올 상반기 기준 점유율은 10.85%(IPTV 합산)으로, 케이블TV 시장만 놓고 보면 1위입니다. 알뜰폰 시장에서는 다소 주춤하고 있네요. KT엠모바일에 1위를 내주고 LG유플러스의 또 다른 자회사 미디어로그에도 뒤처지는 모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