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데일리 윤상호기자] 삼성전자 이건희 회장이 6년여의 투병 끝에 25일 별세했다. 향년 78세.
그는 1987년부터 2014년까지 27년 동안 삼성을 이끌었다. 삼성은 1987년 매출 9조9000억원 자산 10조4000억원 시가총액 1조원에서 2018년 매출 386조6000억원 자산 878조3000억원 시가총액 386조원으로 성장했다. 그룹 대표주자 삼성전자는 세계 정보통신기업(ICT)으로 성장했다. 2020년 기준 삼성전자 브랜드 가치는 세계 5위 623억달러(약 70조9900억원)다.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삼성전자의 오늘은 그가 주도한 반도체 사업을 빼고 얘기하기 어렵다. 삼성전자 메모리반도체 점유율 1위는 1974년 이 회장의 한국반도체 인수가 첫발이다. 1986년 7월 처음으로 1메가바이트(MB) D램을 생산했다. 1992년 세계 최초 64MB D램을 개발했다. 이후 삼성전자는 기술과 점유율 메모리반도체 1위를 놓치지 않았다.
반도체 다음은 휴대폰. 이 회장은 “반드시 1명당 1대의 무선 단말기를 가지는 시대가 옵니다. 전화기를 중시해야 합니다”라고 독려했다. ‘애니콜 신화’의 시작이다. 1995년 국내 시장 1위에 올라섰다. 2005년 연간 생산량 1억대를 돌파했다. 2011년 세계 스마트폰 1위를 차지했다. 2012년에는 전체 휴대폰 1위를 달성했다.
실패도 있었다. 자동차다. 국제금융기구(IMF) 외환위기를 넘지 못했다. 삼성자동차는 법정관리를 거쳐 2000년 르노에 넘어갔다.
또 이 회장은 한국 기업문화 개선을 이끌었다. 1995년 한국 기업사의 새로운 길을 열었다. 신입사용 공개채용에서 학력제한을 철폐한 것.
그는 “대학 졸업장과 관계없이 입사할 수 있는 기회를 동일하게 주고 입사 후 승진, 승격에도 차별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삼성의 입사 기준은 학력이 아니고 실력입니다”라고 강조했다. 삼성은 대졸 공채 대신 3급 신입사원 입사시험을 도입했다. 지금도 다른 회사에 비해 삼성 임원은 출신지역 학교 등이 다양하다.
여성에 대한 기회도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뒀다. 이 회장은 “여성 인력을 활용하지 못하는 것은 자전거 바퀴 2개 가운데 하나를 빼 놓고 다니는 것과 마찬가지다”라고 했다. 국내 기업 중 처음으로 사내 어린이집을 개소했다.
아울러 생태계 동반성장을 잊지 않았다. 1988년 중소기업과 공존공생을 선언했다. 삼성이 영위하던 352개 품목을 단계적으로 중소기업에게 넘겼다. 1993년 신경영 선언에도 이 뜻을 담았다.
이 회장은 “삼성그룹 대부분 양산조립을 하고 있는데 이 업의 개념은 협력업체를 키우지 않으면 모체가 살아남지 못하는 것입니다”라고 환기했다.
삼성에서는 하청업체라는 말이 사라졌다. 업계 전반 협력업체라는 말이 대중화한 계기다. 다 같은 삼성 가족임을 선언했다. 협력사와 수평적이고 전략적인 파트너 관계를 맺으라고 주문했다.
한편 그의 마지막 경영 화두는 ‘도전’. 2014년 신년사에서 구성원에게 기존 성공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도전에 나서야 한다고 했다. 변화한 위상에 맞는 사회적 책임도 당부했다. 신년사를 통해 “핵심사업은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경쟁력을 확보하는 한편 산업과 기술의 융합화 복합화에 눈을 돌려 신사업을 개척해야 합니다”라며 “지난 20년간 양에서 질로 대전환을 이뤘듯이 이제부터는 질을 넘어 제품과 서비스, 사업의 품격과 가치를 높여가자”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