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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클로즈업] 넷플릭스-SKB 재판에 숨은 CP와 ISP의 관계학


[디지털데일리 권하영 기자] “언제든지 피어링을 중단할 수 있다?”

지난 20일 넷플릭스가 SK브로드밴드에 제기한 망 이용대가 항소심 4차 변론이 열렸습니다. 이때 넷플릭스가 변론 말미에 이렇게 얘기합니다. “피고(SK브로드밴드)는 언제든지 피어링을 중단할 수 있었는데, (그러지 않았다는 것은) 이익을 다 누리고 돈도 받겠다는 것”이라고 말이죠. 피어링(Peering)을 중단한다는 것은 쉽게 말해 SK브로드밴드가 넷플릭스에 망 접속을 끊어버린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이는 현실과 동떨어진 얘기입니다. 전기통신사업법 제50조 제1항 5호에서는 ‘전기통신사업자가 전기통신이용자의 이익을 현저히 해치는 방식으로 전기통신서비스를 제공하는 행위’를 금지행위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이용자 피해를 일으키면 법에 저촉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변론 당시 SK브로드밴드 측도 그래서 이에 대해 “현행법상 이용자 불편을 야기하는 행위를 할 수 없다”고 반박했습니다.

그런데 넷플릭스 측 변호인이 현행법을 몰랐던 걸까요? 그건 아닐 겁니다. SK브로드밴드가 정말 넷플릭스에 대한 피어링을 중단(디피어링·de-peering)한다 해도, 넷플릭스는 그렇게 큰 손해를 입지 않을 거라고 판단한 겁니다. 현재 SK브로드밴드는 넷플릭스에 전용망(프라이빗 피어링·Private Peering)을 제공하고 있는데, 전용망이 사라지면 넷플릭스는 대신 트랜짓(Transit)으로 서비스를 할 수 있습니다.

피어링이 ‘직접접속’이라면 트랜짓은 ‘중계접속’입니다. 콘텐츠제공사업자(CP)가 트래픽을 전송하면, 중계 역할을 하는 인터넷제공사업자(ISP·통신사)가 다른 ISP로 한번 더 트래픽을 전송하는 방식입니다. 예를 들어 SK브로드밴드 대신 KT를 통해서도 SK브로드밴드 이용자에게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거죠. 문제는, 트랜짓의 경우 여러 통신사를 거치기 때문에 콘텐츠 품질 확보가 어렵다는 점입니다.

즉, 피해를 보는 것은 SK브로드밴드 이용자입니다. 넷플릭스 서비스의 전송속도가 느려지는 등 품질이 나빠질 테니까요. 그렇게 되면 당장 욕 먹는 건 통신사뿐입니다. 자칫 규제기관으로부터 제재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페이스북(현 메타) 사례가 그렇습니다. 페이스북은 CP이지만 고의로 접속경로를 바꿔 서비스 속도를 느리게 만들었는데, 방송통신위원회(이하 방통위)가 과징금을 부과한 일이 있습니다.

이는 결국 넷플릭스와 SK브로드밴드, 즉 CP와 ISP간의 관계가 동등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일각에선 ISP가 CP로부터 콘텐츠를 전송받아도 일방적으로 망을 끊어버릴 힘이 있으니 게이트 키퍼와 같은 ‘착신 독점력’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데, 적어도 우리나라에선 성립되기 어려운 말입니다. 오히려 반대일 수 있습니다. 넷플릭스처럼 망 이용대가 협상을 거부한다 치면, ISP는 대응할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 국회에선 이와 관련한 몇 가지 법안들이 발의돼 현재 계류돼 있는 상태인데요. 넷플릭스와 같은 부가통신사업자가 ISP를 통해 서비스를 제공할 때, 반드시 ISP와 망 이용계약을 체결하도록 의무화한 것이 골자입니다. ISP가 CP보다 협상 열위에 있을 수밖에 없는 불균형적 구조를 상쇄하기 위함이죠. 이제 국회 상임위 배분이 얼추 정리가 됐으니, 이 법안들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가 얼른 진행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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