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시간
뉴스

생활경제

정산 60일→35일 단축 추진…유통업계 “中企 판로 되레 좁아질 수도”

전문가들 “해외도 거래 특성 따라 탄력 적용…일률 규제 신중해야”

티메프 입점 셀러들로 구성된 티메프 피해 판매자 비상대책위원회가 피해 소비자들과 연합을 맺고 서울 신사동 아리지빌딩 티몬 사옥에서 함께 검은우산 집회를 연 모습. 해당 사진은 본 기사와 관련 없음.

[디지털데일리 왕진화기자] 국회가 유통업체의 납품대금 지급기한을 현행보다 크게 단축하는 입법에 속도를 내면서 유통업계가 반발하고 있다.

티메프 사태 이후 납품업체의 대금 회수 안정성을 높이겠다는 취지지만 직매입 구조를 고려하지 않은 일률적인 정산주기 단축이 오히려 유통사의 매입 여력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특히 자금 부담이 커진 유통사가 판매 회전율이 높은 대기업 제품 위주로 매입을 재편할 경우 중소·신생업체의 판로가 줄어드는 역효과가 나타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전문가들도 정산주기 단축이 유통사의 운전자본 부담과 상품 매입 축소로 이어질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유럽과 미국, 일본 등 주요국에서도 거래 특성과 재고 회전율 등을 고려해 정산기한을 탄력적으로 적용하는 만큼 국내에서도 지급 속도뿐 아니라 거래 안정성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정산 빨라지면 유통사 자금 부담↑…“중소·신생업체 매입 줄어들 수도”=2일 업계에 따르면 전날 국회 정무위원회 법안심사제2소위원회는 유통업체의 직매입 대금 지급기한을 상품수령일로부터 최대 60일에서 35일로 단축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대규모유통업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공정거래위원회와 여당 의원들이 주도한 법안으로 대상은 매출 1000억원 이상 유통업체다. 특약매입·위수탁·임대을 거래의 경우 판매 마감일로부터 지급기한을 기존 40일에서 20일로 단축한다.

향후 정무위 전체회의와 국회 본회의 등을 최종 통과하면 대금 지급기한은 5년 만에 다시 단축된다. 공정위는 지난 2021년 중소 납품업자의 현금흐름을 개선하기 위해 대금 지급기한을 60일 이내로 정하도록 법을 개정한 바 있다.

현재 35일 이상 정산하는 주요 유통업체로는 다이소와 쿠팡, 컬리, 홈플러스 익스프레스 등이 있으며 전자랜드와 영풍문고, 주요 TV홈쇼핑과 이커머스 플랫폼들도 대상인 것으로 알려졌다.

유통업계가 가장 우려하는 대목은 직매입 사업자의 운전자본 부담이다. 주요 대형 유통업체들은 상품이 실제 판매되기 전 미리 대량으로 매입한 뒤 판매 여부와 관계없이 납품업체에 대금을 지급한다.

정산주기가 단축되면 향후 3~6개월, 길게는 1년 뒤 판매될 상품까지 매입한 뒤 한 달 안팎에 납품업자에게 대금을 지급해야 하는 셈이다.

유통업계 관계자는 “대금 정산기한을 60일에서 절반 수준으로 줄이면, 유통업체는 물건이 팔리지도 않은 상황에서 기존보다 2배 많은 현금을 묶어둬야 한다”며 “회전율이 높아 1주 단위로 물건을 팔고 발주하는 대기업 인기 브랜드만 살아남고, 매입 예산 부족에 회전율이 느린 시즌 상품, 중소기업 및 신생업체 제품이 퇴출당할 것”이라고 말했다.

강형구 한양대 파이낸스경영학과 교수는 “정산기한 단축으로 ‘매입채무 지급일수’(DPO)가 짧아지면 기업은 더 많은 운전자본을 조달해야 하고, 조달비가 늘어난다”며 “예를 들어 정산기한을 60일에서 30일로 줄이고, 조달금리 6%에 연간 매입원가가 1조원인 경우 추가 운전자본비용만 연 50억원이 발생한다. 물건이 팔리기도 전에 비용급증으로 현금이 바닥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정산기한 단축에 따른 운전자본 부담이 커질수록 유통업체가 매입 규모 자체를 줄일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다.

◆해외는 거래 특성 따라 탄력 적용…“정산 속도보다 안정성 고려해야”=해외 주요국에서도 정산주기를 일률적으로 단축하기보다는 거래 특성 등을 고려해 비교적 폭넓게 인정하고 있다는 게 업계 주장이다.

유럽집행위원회(EC)는 지난 2023년 기존 60일이던 정산기한을 30일로 줄이는 방안을 추진했지만 프랑스와 이탈리아, 벨기에 등에서 “중소기업을 죽이고 대기업하고만 거래하는 부작용을 낳는다”는 반발이 나오면서 철회했다.

당시 정산기한 단축 시 유럽 유통사에서 1000억~1500억유로(한화 150조~220조원)의 현금이 빠져나가 금융 공백이 발생하는 반면 부족한 현금흐름을 메우기 위한 대출 등 자금 조달 이자 비용으로만 연간 100억~150억유로가 필요한 것으로 조사됐다.

유럽연합(EU)은 대금지급 지연 규정(Late Payment)을 통해 납품사와 합의할 경우 정산주기를 60일까지 인정하고 재고 보유기간이 60일을 넘거나 회전율이 낮은 계절상품 등에 대해서는 최대 120일까지 예외를 허용하고 있다.

미국 아마존과 월마트는 최대 90일, 코스트코와 베스트바이는 최대 60일의 정산주기를 두고 있다. 중국 최대 유통기업인 다룬파와 우마트는 90~120일, 일본 이온그룹과 세븐앤아이는 최대 60일 수준이다.

글로벌 유통기업들은 납품업체에 약속한 대금을 지급하기 위한 현금 유동성과 실제 판매 시점 등을 감안해 정산주기를 조정하고 있다.

니먼 마커스 등 명품백화점 체인을 운영하는 삭스 글로벌그룹도 지난해 납품업체 정산주기를 30일에서 90일로 늘린다고 발표했다. 정산주기 연장을 통한 회사의 운전자본을 2억달러 규모로 늘려 납품 브랜드의 매출 성장을 지원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사진=챗GPT가 생성한 이미지]

◆매입 축소·반품 증가 우려…“지급 속도보다 거래 안정성 봐야”=정산주기 단축이 중소기업 보호라는 당초 취지와 달리 유통업체의 대기업 선호 현상을 강화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지난해 유병준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이커머스 정산주기를 60일에서 20일로 축소할 경우 입점업체와 소비자 후생, 직매입 플랫폼 등에 47조7000억원의 경제적 손실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됐다.

정산주기 단축 1년 뒤 유통사와 거래를 유지하는 입점업체 비율은 74%로 떨어지고 중소업체의 시장 피해액은 연간 최대 21조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됐다. 중소업체 약 30%가 정산주기 단축의 영향으로 퇴출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직매입 업체의 거래액과 운전자본이 감소하면서 상품 매입을 축소하기 때문이다. 유 교수는 “직매입형 플랫폼은 상품을 직접 구매해 재고를 보유하는 구조라 운전자본 부담이 급격히 늘어난다”고 말했다.

매입 규모 축소뿐만 아니라 규제를 피하기 위해 유통업체가 미판매 상품을 납품업체에 반품하거나 직매입 대신 실제 판매된 상품에 대한 대금을 지급하는 ‘특약매입’이나 ‘위수탁’ 거래를 늘릴 가능성도 제기된다.

중소업체 입장에서는 특약매입이 직매입보다 유통업체와의 교섭력 격차가 커 불공정 거래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도 있다.

한국개발연구원의 ‘대규모 유통업의 거래유형 분석과 정책방향’ 보고서에 따르면 1998년부터 2020년까지 유통 분야 의결서를 분석한 결과 거래액 1000억원당 불공정 행위 발생 빈도는 특약매입이 4.24건, 직매입은 2.1건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공정위가 실시한 유통 실태조사에서도 특약매입 거래로 인한 대금 지연지급 경험률은 4.3%로 직매입 2.9%보다 높았다.

전문가들은 유통업체의 단기 자금 경색에 따른 부도 위험과 중소기업 상품 매입 감소 등의 부작용을 함께 고려해 법안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입을 모았다.

전성민 가천대 경영학부 교수는 “정산의 ‘속도’보다 거래의 ‘안정성과 자율성’을 방점에 둬야 한다. 유럽 등 해외에서도 기업의 규모와 산업, 특성, 거래 유형에 따라 예외 사항을 폭넓게 판단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동일 한국유통학회 명예회장(세종대 교수)은 “티메프 사태는 자금 흐름 관리 실패로 인한 시장 신뢰 훼손이 원인이지, 정산주기 설정이 문제가 아니다”며 “충분한 자금력 없이 시장 진입을 노리거나 성장 하려는 유통 플랫폼에 큰 타격을 안길 것”이라고 지적했다.

강형구 교수 역시 “대금 정산주기는 매입 규모에 비례하는 상황에서, 급격한 규제는 소량 매입 전환, 납품업체의 가격 경쟁력 저하로 인해 결과적으로 소비자 상품 선택권마저 줄어들 수 있다”고 우려했다.

디지털데일리 네이버 메인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