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주연 카카오벤처스 심사역이 '의료 AI, 병원의 문턱을 넘어서'를 주제로 발표하는 모습.
[디지털데일리 이건한기자] 의료 인공지능(AI)이 기술적으로는 성숙기에 접어들었지만, 병원 현장에서는 여전히 확산의 벽을 넘지 못하고 있다. 22일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카카오벤처스 인사이트풀데이 2025’에서 의료계와 스타트업 관계자들은 “AI의 문제는 기술이 아니라 신뢰”라며 병원 내 도입 지연의 현실적 이유와 해법을 공유했다.
정주연 카카오벤처스 심사역에 따르면 국내 의료 AI는 현재 기술적 성숙 단계에 진입했다. 작년 기준 누적 의료기기 인허가 건수는 388건에 달하며 신의료기술 평가 유예 등을 통해 비즈니스 모델이 확립된 제품도 19건에 달한다.
하지만 병원 현장의 분위기는 다르다. 정 심사역은 "제품과 비즈니스 모델 구조까지 완성된 제품이 20건 가까이 된다"면서도 "실제 환자들도 병원에서 의료 AI를 사용하는 의사들을 아직 보기 어렵다고 한다. 의사들도 아직 AI 사용이 어렵고 허들도 느껴진다고 토로하는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이날 패널 토론에서는 대학병원 교수, 개원 의사, 의료 AI 스타트업 관계자 등 현장 내 이해관계를 잘 알고 있는 전문가들이 각자의 시각에서 현실적인 어려움과 허들 극복 노하우를 공개했다.
◆ 대학병원 - "내부 조율과 소통부터 쉽지 않아"
먼저 의료 AI 도입과 확산의 핵심 관문인 대학병원은 '내부 조율'의 어려움이 주된 허들이었다. 차원철 삼성서울병원 교수는 "개인적으로 새로운 의료 AI 솔루션들은 굉장히 흥미롭게 느껴지고 테스트하고 싶은 마음도 크다"면서도 "연구자로서의 호기심과 병원의 정보 책임자로서 느끼는 현실적 고민의 충돌이 있다"고 말했다.
의료 AI 도입으로 인한 보안 우려, 추가 비용, 시스템 통합 과정의 애로사항이 적지 않다는 이야기다. 또한 차 교수에 따르면 병원이 이미 굉장히 최적화된 워크플로우로 운영되고 있는 점도 새로운 AI 서비스 도입의 허들이 되기도 한다. 어떤 의료 AI의 도입이 누군가의 추가 업무, 시스템 비용 추가로 이어져 기존 균형이 깨질 경우 의료진의 부담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설명이다.
더불어 대학병원은 수천명의 직원, 수백명의 교수의 업무와 진료 영역이 모두 다르다. 차 교수는 "AI 도입을 위해 상대방의 각기 다른 업무 영역을 충분히 이해하고 대화하는 일도 현실적으로 쉽지만은 않은 일"이라고 토로했다. 이런 일이 내부에서도 어려운데 외부 의료 AI 기업들이 병원의 문을 여는 일은 더 어렵지 않겠냐는 설명이다.
◆ 개원가 - '돈 낼 의향'이 가장 큰 장벽"
반면 '정글'에 비유된 1차 의료기관, 즉 개원가가 AI에 거는 기대는 '효율'과 '수익'이었다. 분당에서 내과를 운영 중인 이승원 원장(한양내과의원)은 개원가 의사들이 AI 도입을 결정하는 주된 판단 기준은 "AI가 환자별 진료 시간을 얼마나 줄여줄 수 있는가"라고 강조했다. 만약 AI가 환자에게 더 많은 설명 시간을 요구한다면 오히려 마이너스라는 설명이다.
비용 문제도 빼놓을 수 없었다. 이 원장은 "동료 의사들에게 모 의료 AI 기업의 제품을 소개하면 곧잘 사용한다"면서도 "그들 대부분이 비용을 지불하면서까지 해당 제품을 쓸 의향이 없는 것도 의료 AI 확산의 허들로 보인다"고 말했다. 대부분 제품의 무료 제공분이 종료되면 추가 결제를 기피한다는 것이다. 해당 제품을 대체할 비슷한 의료 AI 제품들이 또 다른 무료 사용 기회를 제공하는 것도 유료 구입 비중을 낮추는 요인이다.
이 원장은 "또한 한국은 기본적으로 수가 제도, 사회적 의료 제도의 특성상 AI 스타트업들이 매출을 올리기 쉽지 않은 환경"이라며 "그러나 기업들도 악조건을 뚫고 병원이 선택할 만한 수준의 킬링 솔루션을 만들고 있느냐고 본다면 아직 아쉬운 편"이라고 덧붙였다.
◆ 스타트업 - 맞춤형 데모와 학회 공략... "신뢰를 설계하라"
이처럼 두 시장의 상이한 허들에 대해 의료 AI 스타트업은 어떤 전략을 취하고 있을까? 수면 데이터 분석 기업 '에이슬립'의 허성진 팀장은 병원과 의원에 따라 전혀 다른 접근을 한다고 밝혔다. 먼저 대학병원은 교수들의 흥미와 도입 의지를 끌어내는 것이 먼저다. 이후 병원의 EMR(전자의무기록) 시스템 연동성, 수익 구조, 그리고 '병원 내 폐쇄망'이라는 기술적 장벽 해결에 대한 준비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개원가는 조금 다르다. 앞서 이 원장의 말처럼 개원의들이 자사 제품 도입을 통해 얼마나 빠른 처방이 가능한지, 즉각적으로 제공하는 편의성과 수익성은 얼마인지 인지시키는 것이 관건이라는 설명이다. 이를 위한 맞춤형 데모 전략도 중요했다. 예컨대 에이슬립은 1차 의료기관에 10건 정도의 무료 처방을 제공한다. 상급병원에는 약 한달 이상의 데모기간에 무제한 사용 조건을 제시하기도 한다.

(왼쪽부터) 차원철 삼성서울병원 교수, 이승원 한양내과의원 원장, 허성진 에이슬립 B2H 리드 팀장, 정주연 카카오벤처스 심사역.
이날 청중석에서는 "(AI 제품을 소개하기 위해) 바쁜 의사들의 시간을 얻는 방법이 있느냐"는 현실적인 질문도 나왔다. 이에 대해 허 팀장은 "크고 작은 학회에 꾸준히 방문해 눈도장을 찍고 제품을 설명하다 보면 시간이 지나 긍정적으로 봐주는 교수들이 많아지는 것 같다"며 적극적인 학회 활동을 추천했다. 차 교수 역시 "학회에서는 아무래도 바쁜 진료실과 달리 마음이 조금 더 열려 있는 편"이라며 학회를 공략하라는 전략에 동의했다.
한편 이날의 논의는 '신뢰'라는 하나의 키워드로 정리됐다. 정 심사역은 "의료 AI는 기술 자체보다 결국 신뢰가 더 중요해 보인다"고 정의했다. 차 교수도 "스타트업이 우리를 대상으로 장사를 하려는 게 아니라 같이 환자의 예후 개선에 고민하고 있다는 인상과 신뢰를 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결국 AI 기업과 병원이 지속적으로 같은 방향을 보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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